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이성낙 논설위원
이성낙 논설위원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에게서 선물받은 책 ‘유관순 누나’를 읽으며 마음 아파하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눈시울이 뻘게지는 바람에 한참을 공부방 밖을 나가지 못했던 것도 기억합니다. 그만큼 ‘3·1운동’ 하면 ‘유관순 누나’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거기에 더해 고등학생 시절에는 교주(校主=재단 이사장)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선생께서 3·1절마다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 앞 연단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곤 하셨습니다. 마이크나 확성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가운데 발바닥부터 시려오는 추위에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낭독하던 육필 독립선언문.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낭독하던 육필 독립선언문.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발을 동동거리며 큰 어른의 낭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학생들이 아무리 추위에 떨어도 간송 선생님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훗날 간송 선생께서 낭독한 독립선언문이 여느 인쇄본이 아닌 정성껏 육필로 쓴 자필본(自筆本)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는데, 그래서인지 더욱더 큰 감흥으로 독립선언문에 담긴 정신이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필자는 3·1운동 당시 벌어진 ‘제암리교회(提巖里敎會) 방화 학살 사건’을 널리 알리는 데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石虎弼), 1889~1970] 박사가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1980년대에 국내 언론을 통해 알았습니다. (주해: ‘삼일절, 제암리 교회가 안 보인다’. 국민일보. 2013.2.25. 칼럼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10년 즈음 문득 제암리를 찾아갔습니다. 그동안 글로만 읽었던 ‘제암리 학살’ 유적지에 전시된 몇몇 기록물은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석호필 박사는 1919년 4월 15일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일본 경찰과 군인이 마을에 들어와 성인 남성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에게 전달할 말이 있으니 모두 교회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교회에 모인 23명가량의 남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하면서 명령에 따라 바닥에 앉았다. 잠시 후 군인들이 교회를 둘러싸고 종이 창문 너머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그때서야 청년들은 명령의 진의를 알게 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죽거나 다쳤는데도 악마 같은 군인들은 불에 잘 타는 초가지붕과 목조 건물에 불을 질렀다. 몇 사람이 뛰쳐나와 도망쳤지만, 그들은 곧바로 총검에 찔리거나 총에 맞았다. (중략) 이것이 제암리에서 벌어진 피의 대학살 사건의 간략한 기록이다.”《제암리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 1919. 4.)》

참으로 귀한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증언이 없었다면 ‘제암리 대학살’은 깊은 미궁(迷宮)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생각을 하면 석호필 박사가 증언한 기록의 무게와 참 가치를 다시금 숙연한 마음으로 반추하게 됩니다.

학살현장을 촬영하는 석호필 박사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
학살현장을 촬영하는 석호필 박사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

‘제암리 대학살’ 사건과 관련해 석호필 박사는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석호필 박사는 당시 어려웠던 교통 상황에도 서울에서 제암리(경기도 수원군 향남면)까지 몸소 찾아가 현장의 참상을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자료를 비밀 경로를 통해 일본 도쿄에 있는 외교가에 전달함으로써 ‘제암리 학살 사건’을 온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래서 석호필 박사를 ‘3·1운동의 제34인’이라 부르기도 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국립현충원 현충관에 모셨습니다.(위키백과)

세계사에서 참혹한 학살 사건이 흔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당에 신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살해한 경우는 아마도 없을 듯싶습니다. 가히 역사에 기록될 만한 학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필자는 석호필 박사가 주저 없이 ‘Massacre(대학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때의 참상이 그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일제강점기가 전혀 짧지 않음에도 일본 제국이 저지른 만행의 흔적은 상대적으로 너무 미미하다고 지적하곤 했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여러 형태의 승전 기념 조형물과 함께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현장 또는 참회의 기념물을 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용서하되 기억하자(Forgive Without Forgetting)”라는 슬로건을 외칩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그 양(量)과 질(質)에서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 선대들이 겪어야 했던 일제의 폭거를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필자는 며칠 전 다시 제암리를 찾아갔습니다. 근 10여 년 만의 일입니다. 그러나 기념 장소에 접근하는 도로만 약간 정리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제암리 학살 사건’의 현장이 오늘날의 시대상과도 거리감이 있어 생소하기까지 했습니다. 홍보 차원의 시각에서 보아도 너무 빈약하기만 했습니다.

아울러 전체 규모가 사건의 무거운 역사성에 비해 지나치리만큼 왜소하고 기념탑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래 우리나라 젊은 층의 한자 해독력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초라한 ‘三一運動殉國紀念塔(삼일운동순국기념탑)’이 이곳이 대학살의 현장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초라한 ‘三一運動殉國紀念塔(삼일운동순국기념탑)’이 이곳이 대학살의 현장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현실적으로 많은 방문객이 그 한자 비문(碑文)을 이해할 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념탑 정면의 비문 ‘三一運動殉國紀念塔(삼일운동순국기념탑)’이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揮毫)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기념비 후면에는 “(전략) 오늘 자주독립을 찾은 두렁바위 사람들은 순국열사의 명복을 빌면서 후세에 영원히 사실을 전하려 하여 당시 피화처였던 예배당터에 정성을 모아 아담한 기념탑을 세운다. 전면은 대통령 리승만 박사 쓰시다. 월탄 박종화 짓고 여초 김응현 쓰다.”라고 돼 있습니다. 

즉, 기념비 전면은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揮毫)이고 후면의 설명에 의하면, 헌사는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1901~1981) 선생이 썼고, 글씨는 서예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1927~2007) 선생이 썼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 박종화 작가, 김응현 서예가를 만나는 기쁨이 더해지긴 했습니다만, 그게 과연 기념비를 찾는 지금 사람들에게 어떤 감흥을 전할까 돌아보게 됩니다.

또한 ‘제암리교회 대학살 사건’이 일본 점령군이 교회당으로 신도들을 유인한 후 불을 지른 집단 살인 행위였다는 사실을 부각해야 한다면, 그 화마(火魔)에 휩싸였던 교회가 위치한 장소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제암리교회 대학살 사건의 핵심 요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월탄 박종화 선생이 언급하신 대로 “아담한 기념탑”으로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어떤 흔적도 볼 수 없습니다. 너무 깨끗한 것이 흠입니다. 근처를 지나는 동네 사람한테 물어도 “아마 저기일 겁니다” 정도의 답이 돌아올 뿐입니다. 만일 교회당이 있던 자리를 혹시라도 사람들이 지나다닌다면 그것은 죽은 이의 넋[魂]을 밟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암리교회 학살 현장을 국내는 물론 온 세계에 알릴 필요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한다면, 경기도 행정청은 물론 거국적으로 새롭게 성지화 작업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이 우리 후손이 해야 할 역사적 과제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소홀히 다루는 것 역시 또 다른 폭거”라는 명언이 생각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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