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훈 논설위원, KBSI 전문연구위원

이석훈 논설위원
이석훈 논설위원

매년 12월이면 서울대학교에서 ‘전재규 학술대회’가 열린다. 2003년 전재규는 지질학자로서의 연구 열의로 연구환경이 열악했던 남극세종기지에 대원으로 참여했고, 12월 조난된 다른 대원들을 구출하러 나섰다가 보트 조난사고로 희생된 과학자다.

그의 희생은 척박하기 그지없는 당시의 극지 연구환경 탓이었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극지 연구의 필수 장비인 쇄빙선의 건조가 미뤄져 60일에 15억 원의 임대료를 내고 쇄빙선을 빌려 사용하다가 악천후로 조난당한 다른 이들을 구하고자 나선 다섯 연구대원이 의지한 것은 작은 고무보트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의 희생을 계기로 정부는 쇄빙선의 조기 도입을 발표했고, 6년 뒤인 2009년 대한민국의 첫 쇄빙연구선인 ‘아라온호’가 건조되어 극지 연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당시까지 한국해양연구원의 일개 부서였던 극지연구부가 2004년 부설 ‘극지연구소’로 승격했다. 본격적인 극지 연구 임무를 전담하는 연구소가 설립된 것이다. 또한 사고 내용과 일련의 조치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극지 연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래서 2004년 말 처음으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극지체험단’을 모집해 지금도 매년 운영하고 있다.

전재규 추모 1주년인 2004년부터 극지 연구의 필요성과 성과에 대한 학술적 발표회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학술대회 주제와 발표 제목에서 극지 연구가 최근 이슈와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2023년 18회 학술대회 전체 주제는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시대의 지구환경과학’으로, 온실가스, 탄소중립, 핵심 광물, 기후위기 시대 자연재해 대응방안 등 극지 연구가 현재 우리가 직면한 기후변화 및 자원 확보와 연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구온난화로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후가 나타나고 있다. 국지적으로 극심한 홍수와 가뭄은 물론이고, 때아닌 한파와 폭염이 몰아닥쳐 사막에 눈이 내리는가 하면 극지방에선 빙하가 녹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2018년 여름 사상 최장의 폭염일수(39일, 평년 14일)를 기록하는 이상기후와 더불어 한류 어종인 명태가 사라지고 열대어가 연근해에 나타나며, 사과의 주산지가 경상도에서 강원도 북부지역으로 바뀌는 등 생태계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온난화의 영향은 극지역으로 갈수록 커진다. 실제 북극은 지난 100년 동안 기온이 약 3도 상승했으며, 최근 20년 동안 북극의 온난화 속도는 전 지구 평균의 4배에 이른다고 보고되었다. 북극의 급격한 기온 상승은 해빙(海氷, 바다 얼음)을 감소시켜 해수면 상승, 생태계 변화, 자원개발 등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북극의 해빙은 10년마다 3.5%씩 감소한다고 보고되었다. 2012년 여름철 해빙 면적이 최소였던 해이기도 하며, 이런 해빙 면적의 감소 추세는 계속되어 2050년경 북극의 여름철에 해빙이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예측된다.

급속한 온난화의 영향은 북극 해저에도 나타나고 있다. 북극 대륙붕에는 해저영구동토층(海底永久凍土層)이 존재한다. 해수면이 지금보다 낮았던 빙하기에 육상에서 형성된 영구동토층이 빙하기 이후 해수면이 점차 높아지면서 바다에 잠기게 되었다. 그런데 따뜻한 바닷물이 들어오면서 얼어있던 해저영구동토층이 녹기 시작했다.

문제는 해저동토층이 녹으면서 갇혀있던 메탄이 대기 중으로 방출된다는 것이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온실효과가 약 25배 강하기 때문에 메탄이 대기 중으로 방출되면 기온을 빠르게 상승시키고, 기온 상승은 메탄의 방출량을 늘릴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런 악순환이 지구온난화를 걷잡을 수 없게 증폭시켜 대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우려한다. 북극의 메탄 방출에 의한 급속한 온난화로 전 지구적 경제적 손실이 60조 달러에 달한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지구 미래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극지 연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극지는 주인 없는 천연자원(수자원, 에너지자원, 광물자원)의 보고이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많은 어종이 이미 서식처를 북쪽으로 옮기고 있다. 2050년에는 북극해 주변 어획량이 전 세계의 39%를 차지할 정도로 늘고, 어종도 2.5배 다양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현재 북극에는 전 세계 미발견 천연가스 30%, 가스하이드레이트(불타는 얼음) 20%와 석유 13%의 에너지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지질자원조사국(USGS)에 따르면 북극에 망간·니켈·금·구리 같은 금속광물이 엄청나게 매장돼 있다고 한다. 반도체, 이차전지 등 선진기술을 갖고 있음에도 핵심 소재 광물자원이 없어 중국 등으로부터 무역 제재를 받았던 우리로선 자원을 선점할 수 있는 극지 자원개발에 하루라도 빨리 매진해야만 한다.

빠른 해빙 감소로 이전에 없던 북극항로가 새로이 개척된다. 부산항에서 로테르담항(네덜란드)까지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수에즈 운하를 이용한 항해 거리와 일수에 비해 최대 3분의 1(7000㎞, 15일) 정도 단축할 수 있다. 최근 벌어진 남중국해의 미-중 갈등, 수에즈 운하 사고 등과 같은 무역항로 장애에 대비한 우회·대체항로로 북극항로의 중요성이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북극해 탐사는 넓은 북극연안국의 배타적 경제수역(북극해 면적의 70%)과 연중 덮고 있는 해빙 때문에 매우 제한적이어서 탐사가 이루어진 지역이 전체 면적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2010년 이후 북극 온난화와 북극 개발이라는 글로벌 이슈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 각국의 북극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주요국은 극지를 선점하기 위해 과학연구와 기술 개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우리도 국제적인 북극해 주도권 확보 경쟁에 대비하기 위해 2774억 원을 투입해 2026년까지 높은 쇄빙 능력과 첨단 과학장비를 갖춘 차세대 쇄빙연구선 건조를 계획했다. 2027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북극점을 포함한 북극해 국제 공동연구를 주도하기 위해서다.

현재 보유 중인 쇄빙연구선 아라온호(6950톤급)는 얼음이 두꺼운 고위도 북극해까지 진출하는 일이 쉽지 않다. 1만5000톤급 차세대 쇄빙연구선은 1.5m 두께의 얼음을 3노트(5.6㎞/h)의 속도로 깰 수 있어 아라온호가 진입하기 어려웠던 북위 80도 이상의 북극해까지 운항할 수 있다. 북극해 탐사 범위 확대에 절대적인 장비이다.

정부는 2022년 ‘제1차 극지 활동 진흥 기본계획’에서 2026년까지 차세대 쇄빙연구선을 건조하겠다고 발표했다. 해양수산부 장관은 기본계획을 차질 없이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2024년도 국가 R&D예산을 감축하면서 2024년도 741억 원으로 계획된 ‘차세대 쇄빙연구선 건조’ 사업은 정부안에서 560억 원이 삭감된 181억 원으로 편성됐다. 관련 연구자들이 예산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삭감된 예산 그대로 확정되었다. 사업 기간을 2026년에서 2029년으로 연장한다는 관련 공무원의 무책임한 대답과 함께.

장기간 계획된 연구개발사업의 예산 삭감도 문제이지만, 미래 국가 발전과 직결된 연구사업이나 국제 공동연구와 같이 신뢰가 담보되어야 하는 연구개발에서 국제적 신뢰와 위상 하락을 초래할 수 있는 무분별한 예산 삭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척박한 연구환경을 언제까지 과학자들의 사명감으로 채워야 하는가! 또 아까운 희생자가 나와야 투자 확대를 들고나올 것인가. 쇄빙선뿐만 아니라 공공연구 개발사업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여 추경에 반영하는 지혜가 발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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