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논설위원,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함인희 논설위원
함인희 논설위원

세월이 흐른 후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면 그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지난해 노벨경제학상은 성별 임금 격차 연구에 평생을 헌신한 하버드대 교수 클라우디아 골딘(Claudia Goldin, 1946~)에게 돌아갔다. 한국에도 소개된 골딘 교수의 책 ‘커리어와 가정’에는 흥미로운 스토리가 가득한데, 나의 눈길을 끌었던 사례가 하나 있다. 1963년 출간 즉시 베티 프리단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책 ‘여성의 신비’에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던 중산층 전업주부 대부분은, 막내 자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재취업의 길로 들어섰고, 자신의 전업주부 시절이 그렇게 불행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노라 고백했다는 것이다.

클라우디아 골딘(왼쪽), 베티 프리단(1921~2006).
클라우디아 골딘(왼쪽), 베티 프리단(1921~2006).

 

1970년대 미국은 여성 취업률이 괄목할 만한 상승세를 보인 시기였다. 그 시절 특기할 만한 사실은 역사상 처음으로 7세 이하 어린 자녀를 둔 기혼여성이 대거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는 점이었다. 당시는 페미니즘 덕분에 여성에게 닫혀 있던 취업문이 활짝 열리면서 어린 자녀를 둔 여성에게도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 잠시 착각했다.

한데 시간이 지나면서 또렷이 보이기 시작한 현실인즉, 당시 서비스 부문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값싼 양질의 노동력이 필요해진 데다, 마침 남성의 실질임금이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어린 자녀를 둔 여성의 취업이 필수화되었음이 드러났다. 어린 자녀를 둔 워킹맘을 두 손 들어 환영한 고용시장은, 여성이 담당해온 돌봄 노동의 공백이 야기하게 될 사회적 비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워킹맘 또한 지금 돌아보니 나이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 여성이 돈 벌러 노동시장으로 나갔으니, 이번엔 남성이 가족 안으로 들어와 여성이 전담했던 일을 평화롭게 나누며 함께해 줄 것이라 기대했던 워킹맘의 소박한 꿈은 망상으로 밝혀졌으니 말이다. 남편 또한 고용주와 다를 바 없이, 아내의 돈벌이는 찬성하지만 집안일이나 양육을 함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제 돌봄 공백은 심각한 현실이 되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미국 여성들이 동원했던 방법이 바로 불법 이주자 여성을 고용하거나, 눈물을 머금고 2교대제(직장에서 풀타임 일하고 집에 돌아와 무급의 돌봄노동을 하는 것을 의미)를 감수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돌봄을 공유하고자 했던 워킹맘의 꿈은 허망하게 물거품이 되었고, 돌봄 노동이 시장의 상품으로 전락하고 만 현실에 ‘유괴당한(abducted)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지금 우리네 출생률 쇼크는 예견된 현상이긴 한데, 압축적 근대화를 추진해온 사회답게 출생률 하강 폭이 세계인의 관심을 끌 만큼 충격적이긴 하다. BBC 한국 특파원 진 맥킨지 기자의 세계 여성의 날 기념 특강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녀 또한 출생률 0.65에 충격을 받아, 한국 여성은 왜 아이를 낳지 않는지 계속 묻고 또 물었는데, 그때마다 경력단절의 두려움과 독박육아의 공포, 그리고 과도한 사교육비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다는 것이다. 여성이 두려워하는 현실을 바꿔주는 것이 해법일 테니, (애꿎은데 돈 쏟아붓지 말고) 차분히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충고를 덧붙였다.

맥킨지의 주장은 여성의 현실을 다룬 통계 한두 개만 봐도 확연히 드러난다. 여성관리자 패널데이터만 해도 한국 여성은 유리천장을 뚫지 못해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과장급에서 차장급으로 승진할 때 대거 경력단절의 주인공이 됨을 보여준다. 출산 및 양육 부담이 경력단절의 일차 원인일 테고, 워킹맘에게 비전을 허용하지 않는 조직문화가 숨은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독박육아의 공포도 리얼하다. 맞벌이 부부의 성 역할 기대 및 만족도를 주제로 한 연구에 따르면, 맞벌이는 필수라 하면서 동시에 ‘집중(혹은 극성) 모성(intensive mothering)’도 당연시하는 비율이 가장 높다. 남편은 돈 벌고 아내는 전업주부인 전통적 성 역할을 지지하는 비율이 그다음이요, 각자 커리어에 충실하고 양육 책임도 공유하는 평등한 성 역할을 지지하는 비율은 가장 낮게 나타난다. 심지어 성 역할 만족도는 전통적 유형이 가장 높고 평등한 유형이 가장 낮은 것이 우리네 민낯이다.

이제는 돈 풀기에 집중하기보다 일터에서 경력단절의 두려움을 불식할 수 있는 제도 및 직장문화를 만드는 데, 더불어 독박육아의 공포를 떨쳐버리고 엄마 아빠가 아름답게 협업하는 육아문화를 만드는 데 우리의 노력이 집중되길 희망한다.

전업주부 아내가 있어 24시간 직장 일에 전념할 수 있는 남성 노동자를 기준으로 한 직장 스케줄, 지금도 여전히 임신한 여성의 불러오는 배는 환영받지 못하는 직장 분위기, 여성 직원이 많은 부서에서는 임신과 출산 시기를 조절해서 인력 공백을 최소화해달라는 요구가 공공연한 현실, 가족에 헌신하는 아빠를 야망 없는 루저로 낙인찍는 비공식적 직장 규범 등등, 워킹맘을 좌절시키는 겹겹의 문화를 바꾸지 않는 한 여성들의 출생 포기 및 기피는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출산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주장에 20대 30대 여성이 열광하는 현실 속에, 저출생 해법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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