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형 논설위원, 젠더뮤지엄코리아 관장

기계형 논설위원
기계형 논설위원

기념할 날이 많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 가족이나 친구의 생일과 같은 개인적 기념일은 물론이고, 가끔은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등과 같은 국가적 기념일을 챙기며 마음의 여유를 내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유엔(UN)이 정한 국제적 기념일은 평등, 자유, 평화, 정의, 인권, 다양성의 인정 등 보편적 가치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

더 나아가 우리의 ‘공동의 집’ 지구(Earth)에 함께 거주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가치를 헤아리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당장 이번 3월만 하더라도 강의 날(3.14), 인종차별 철폐의 날(3.21), 물의 날(3.22), 인권침해 진실에 관한 권리와 희생자의 존엄의 날(3.24), 노예제 및 대서양 노예무역희생자 추모의 날(3.25일),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3.31) 등이 있다.

그런데 3월의 기념일들 중에 3.8세계여성의날(International Women’s Day, March 8)처럼 독보적인 날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이 남자와 마찬가지로 존엄한 존재이며, 그러한 존재로 살 수 있도록 교육권, 직업권, 참정권을 보장받기 위한 세계여성들의 집단적 연대를 기념하기 때문이다. 또한 3.8세계여성의날은 1975년 유엔이 세계적인 기념일로 지정하기 이전인 1909년 미국 여성노동자들이 노동권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벌인 시위, 1910년 유럽의 사회주의자 여성들의 여성의 날 제안 등 그 의미를 공유한 1세기가 넘는 기억과 실천의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기억과 실천의 역사 안에는 한국여성의 경험이 포함되어 있다. 

세계여성의 날 포스터. asiapacific.unwomen.org
세계여성의 날 포스터. asiapacific.unwomen.org

놀랍게도 한국에서는 이미 일제 강점기부터 세계여성의 날에 대한 이해가 있었음이 그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 전해진다. 1924년 사회주의운동 계열의 조선여성동우회는 3월 8일에 맞춰 ‘국제무산부인(國際無産婦人)데이’를 기념하는 강연회를 개최하려고 계획했으나 일제 경찰의 금지명령으로 열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듬해에는 조선여성동우회, 경성여자청년동맹, 경성여자청년회 합동으로 기념강연회를 개최하는 데 성공하였다. 김조이, 박희자, 주세죽, 박원희, 허정숙 등이 여성의 해방과 부인운동의 의미, 그리고 조선 무산부녀의 상황 등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하지만 시대일보는 1926년 3월 12일자에서 ‘禁止! 또 禁止 부인선전주간’이라는 제목으로 여성들의 행사가 지속적으로 방해를 받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국제무산부인데이를 기회로 경성여자청년동맹 주최로 10일부터 이어 일주일 예정으로 부인선전주간을 정하고 부인문제 통속강좌를 연다 함은 기보한 바 있거니와 10일에 종로서로부터 돌연히 집회 금지를 시켰다고 한다.”

1927년 5월 근우회가 조직된 이후 국제무산부인데이 기념행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경찰의 간섭과 압박이 심해 집행부는 4월 16일로 기념일을 바꾸는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칠성은 시위행사를 제안하기도 했는데 경찰의 감시를 받아 무산되었다. 이처럼 어렵게 진행된 국제무산부인데이는 1931년까지 지속되다가 일제의 금지명령으로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4년 3월 중외일보 신문기사는 국제무산부인데이에 대한 관심이 강원도 산간지역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기사에 의하면, 강원도 속초에서 조선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표로 항일단체에서 활동한 변소봉과 김덕수는 3월 8일 정어리공장 여성노동자들을 만나 국제무산부인데이 기념일의 유래와 의의를 설명하고 여성노동자 단체의 필요성을 연설하다 경찰에 체포되고 8개월 수감생활을 하였다.

그 후 해방공간에서 국제무산부인데이 기념식이 다시 개최되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1946년 전국부녀총동맹과 독립촉성부인단, 여자국민당, 한국애국부인회 등의 여성단체가 기념강연을 했다. 1947년에는 남조선민주여성동맹이 3월 8일까지 일주일간을 부녀해방투쟁 주간으로 정하여 천도교기념관에서 국제무산부인데이 기념식을 거행하였으니, 우리에게도 세계여성의 날의 기치와 의미가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다. 참혹한 일제 강점기에 독립을 위한 노력과 함께 합법, 비합법으로 세계여성의날을 기념하였고, 해방공간에서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이념에 상관없이 여성들이 3.8세계여성의날을 기념하며 봉건사회의 도덕과 윤리나 모욕적인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삼았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의 2024년 행사 포스터.
한국여성단체연합의 2024년 행사 포스터.

3.8세계여성의날 기념 한국대회는 1985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관하여 기념행사를 시작한 지 올해로 39회를 맞이하였다. 매년 3월 8일 전 세계 여성들과 소녀들의 공헌을 기념하고 성평등 발전을 위한 주요 과제를 성찰하기 위해 개최되는 세계여성의 날이 2024년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올해는 3월 8일 금요일 바람이 부는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여 성과 보고, 거리행진 등 각종 행사를 진행하였다.

올해 2024년 3.8세계여성의날 주제는 ‘여성에 대한 투자: 발전의 가속화’이다. 여성에 대한 투자는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함께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두의 미래와 발전을 가속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주제이다.

한국 IWD 포스터.
한국 IWD 포스터.

해결해야 하는 많은 현안이 산적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3.8세계여성의날에 국제적으로 제기되는 주제는 여성만의 사안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안일 수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면 어떨까? 2023년 한국의 젠더 격차지수가 전체 146개 국가 중 105위라는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가치에 민감하고 권리의식이 높은 자발적인 시민들이 자신이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회는 더없이 건강하다. 일제 강점기나 해방 후 혼란기에 국제무산부인데이를 애써 기념하려고 했던 여성들도 평등과 존엄을 외쳤다는 점에서 현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머지않아 3.8세계여성의날이 우리 사회가 애써 성취한 내용들을 함께 즐기는 축제의 장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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