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허찬국 논설위원
허찬국 논설위원

2024년은 나라 안팎에서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많은 해다. 4·10총선을 앞두고 우리의 정치권이 격동하며 볼거리가 양산되고 있다. 별로 관심을 못 받지만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Economist)는 세계 167개 나라를 대상으로 민주주의지수를 발표한다. ‘완전한 민주주의,’ ‘결함 있는 민주주의,’ ‘혼합된 체제,’ 그리고 ‘권위주의 체제’(즉, 독재)로 등급을 매긴다. 최신인 2022년 기준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는 스페인과 체코 사이 순위(24위)로 완전한 민주주의 등급을 받은 그룹의 마지막 국가이다. 러시아, 중국, 북한은 권위주의 체제 회원국이다.

30위로 ‘결함 있는’ 그룹에 속한 미국의 순위를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한국의 정치 현실에 실망하며 우리보다 나은 곳이 있겠지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슬픈 소식일 수 있다. 지수를 만든 주체가 허투루 하는 곳이 아니다. 나름 과학적인 방법으로 다섯 가지 범주(선거절차 및 다원주의, 시민의 권리, 정부의 기능, 정치 참여, 정치 문화)에 대해 전문가와 여론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작성했다 한다. 지수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정치학 전문가들에 맡기고 문외한인 필자는 순전히 비전문가적, 온전히 주관적인(즉, 십중팔구 틀린) 해석을 해본다.

미국의 순위가 낮은 것은 사람 됨됨이에 문제가 있는 대통령을 뽑았기 때문이다. 법치 원칙과 역사의식, 도덕성, 박애정신 등은 포지티브 목록 방식의 바람직한 지도자의 덕목일 것이다. 하나 이게 지나친 기대라는 것을 나이가 들며 깨달았다. 이제는 네거티브 목록 방식에 의지하고 있는데 요즘 의료위기 사태로 회자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나오는 “무엇보다도 해를 끼치지 말라(First, do no harm)”이다. 부연 설명하자면 애들이 따라 할 수 있으니 ‘나서서 나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해석한다. 이런 면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실시되어 보이는 전직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자격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트럼프가 2016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을 때 주류 언론이 자신에 대해 특히 비판적이라며 이를 훈장처럼 자랑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그런데 한 대규모 유세 영상을 보면 언론을 조롱하는 대목에서 팔과 손목을 기괴하게 뒤트는 동작을 했다.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청중은 좋다고 웃고 박수쳤다. 알고 보니 자신을 자주 취재하던 뉴욕타임스 기자를 흉내 낸 것이었다. 희소 질병으로 팔과 손목 장애가 있는 이 기자의 모습을 한 번 보면 트럼프가 누구 흉내를 내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필자는 초등학교 때 지체 장애우를 흉내 내다 마침 이를 본 선생님(6·25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은)에게 혼쭐난 적이 있다. 평소 짓궂은 장난을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전학한 지 오래되지 않아 주위 아이들의 호감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하반신을 못 쓰는 급우를 흉내 내어 주위의 싼 웃음 동냥 받으려 그랬던 것 같다. 열 살쯤 된 어린 마음에도 자신의 행동이 무척 부끄러웠고, 남을 조롱하는 연기는 이게 끝이었다.

트럼프가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던 2017년 1월,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배우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이 그의 이런 언행을 엄중히 지적했다. 스트립은 평생 공로상을 받은 후 행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해 가슴을 후비고 말문이 막히는 연기를 보았습니다. 긍정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의도한 바는 잘 전달된 것이 청중은 요란을 떨며 웃더군요. 이 나라에서 제일 존경받는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이 지체장애 기자를 흉내 낸 것이었습니다. 특혜, 권력, 반격할 수 있는 능력 면에서 자신보다 훨씬 떨어지는 사람을 대상으로 말입니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 크게 마음이 아팠는데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스트립은 이어 이렇게 지적했다. “권좌에 있는 사람이 남에게 모멸감을 일으키고픈 충동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은 모두에게 이런 행동을 해도 좋다고 허락하는 것과 같아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모욕은 모욕을 불러옵니다. 폭력은 폭력을 유발하죠. 힘센 사람이 자신들의 위상에 기대어 남을 괴롭히면 우리는 모두 피해자가 됩니다.”

골든 글로브가 외신 기자단이 선정한 상이라는 점을 감안한 그녀는 언론의 책무를 언급했다. “...그렇기에 언론은 원칙을 고집하며 권력의 책임을 묻고, 권력자들의 비행을 낱낱이 드러내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헌법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이유입니다.”

시상식 후 트럼프는 과대평가된 배우 스트립이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퍼트리고 있다고 트위터를 통해 우겼다. 그가 조롱거리로 삼은 것은 지체장애뿐만 아니었다. 과거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명문 군인가문에서 태어나 베트남전에 항모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격추되어 잡혀 5년 반 동안 혹독한 포로생활을 했다. 트럼프는 매케인이 포로로 잡혔던 것을 조롱거리 삼았다. 베트남전쟁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징병을 면제받았던 트럼프가 사람 됨됨이가 훌륭하다고 평가받던 전쟁 영웅 매케인을 씹은 것이다. 중남미계(系) 판사가 자신에 불리한 판결을 내리자 트럼프는 판사의 태생을 들먹이며 불평하기도 했다.

메릴 스트립의 말대로 MAGA가 트럼프에 열광하는 배경은 권력자가 자신들이 숨겨왔던 저급한 충동과 편견을 표출해도 된다고 허락한다는 만족감이 아닐까. 이런 사람이 다시 미국의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 하니 이코노미스트지의 민주주의 순위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