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훈 논설위원, KBSI 전문연구위원

이석훈 논설위원
이석훈 논설위원

작년 10월 대전 과학축제 때의 일이다. 혈액형 판별 부스에서 한 중학생이 한참을 주저하다가 혈액형 검사에 참여해 결과를 확인하더니 곧바로 울상을 지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해서 따로 불러 물어보았더니 자기는 입양아인 것 같다는 것이다. 아버지 혈액형은 AB형이고 어머니 혈액형은 O형인데, 자기 혈액형이 부모님의 혈액형에서 나올 수 없는 AB형이라는 것이다. 이전 검사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어 오늘 다시 검사했지만 역시 AB형으로 판별되었단다.

그동안 배운 지식으론 AB형-O형 부모에게선 A형 또는 B형의 자녀만 있을 수 있지, AB형은 나올 수 없기에 본인은 입양아임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혹시 유전자 검사를 해보았는지 물었더니, 겁이 나서 부모님께 말씀드리지는 못하고 혼자 고민만 하고 있던 차에, 과학축제에 참여했다가 혈액형 판별 부스가 있어 혹시 하는 마음으로 혈액형 검사를 했다고 한다.

청소년 과학강연에 가끔 등장하는 주제여서 약간의 상황설명을 덧붙일 수 있었다. ABO식 혈액형에서 AB형 사람은 하나의 염색체에 A유전자, 또 다른 염색체에 B유전자를 갖기에 O형 배우자를 만나면 A형 또는 B형의 자녀가 태어난다. 그러나 특이한 혈액형 중 하나인 Cis-AB형은 A와 B유전자가 하나의 염색체 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A유전자와 B유전자가 분리되지 않고 통째로 유전된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Cis-AB형인 사람이 O형 배우자를 만나면 당연히 AB형 또는 O형의 자녀가 태어난다.

우리나라에 Cis-AB형 혈액형인 사람이 다소 있다는 설명과 함께 아버지와 본인의 혈액형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알려주며 상담을 마쳤다. 이후 연락이 닿지 않아 아버지와 본인의 혈액형이 Cis-AB형으로 확인돼 고민이 해소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특이성에 대한 부연 설명 없는 ABO식 혈액형만의 교육이 이런 혼란을 초래한 것 같아 안타깝다.

19세기에는 외과수술은 발전했으나 사람 혈액형의 상호관계를 모르던 때라 수혈 과정에 피가 응고되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도 악마의 저주로 치부하는 등 환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1901년 혈액형의 중요성을 깨달은 오스트리아의 의사이자 생화학자 칼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가 인간의 혈액은 호환성에 따라 서로 다른 그룹으로 나뉜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를 토대로 ABO식 혈액형 구분 체계를 만들었다. ABO식 혈액형 체계는 외과수술 및 수혈 등의 의학적 활용에 획기적으로 기여했으며,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ABO 혈액형 체계가 한국에 처음 도입된 정확한 날짜는 기록에 없지만, 1920년대 이후에 세계적으로 혈액형 체계가 연구되고 적용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ABO 혈액형 체계가 소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이 체계는 수혈 및 장기 이식, 범죄 수사, 가계도 작성 및 혈연 확인 등에 활용되고 있다. 한편으론 다른 형태의 혈액형 연구도 계속되어 다양한 종류의 혈액형이 발견되었지만,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오해를 불러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Cis-AB형과 같은 특이 혈액형의 유전은 가족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본인의 혈액형이 Cis-AB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남편이 O형 자녀가 태어나면 아내를 의심하여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고, 친자 확인 유전자 검사를 종용하여 부부간에 또 다른 불씨를 남기는 사례도 있다.

Cis-AB형은 한국인에게만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희귀 혈액형이다. 특히 한국 서남부 지역과 일본 규슈(九州) 지역의 한국계 주민들에게서 주로 발견된다. 이 혈액형을 가진 사람 수의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국제수혈학회지 '복스 산구이니스(Vox Sanguinis)'에 의하면 광주·전남지역 헌혈자를 대상으로 혈액형을 분석한 결과 1만 명당 3.5명 정도 Cis-AB형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추정하면 수천 명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 Cis-AB형이 과거에는 한정된 지역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아 지역적 특성이 강했지만, 현재는 결혼, 직장 등의 이유로 여타지역 이전이 많아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특이 혈액형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또한 국제적으로 인적 교류가 늘어나고 있기에 가족 간의 불화 원인을 차단하고, 응급 상황에 대비하는 혈액 관리에 필요한 특이 혈액형을 하나 더 소개하고자 한다. 봄베이(Bombay) O형이 그것이다. 봄베이 O형은 분명히 염색체에 A 또는 B유전자가 있지만 적혈구에는 A형 또는 B형 항원이 없어 어떤 혈액과도 엉기지 않는다. 실제 혈액형이 A형 또는 B형임에도, ABO식 혈액형 검사에서는 O형으로 표현되는 혈액형이다. 이 혈액형은 인도의 도시 뭄바이(Mumbai)를 중심으로 처음 발견되어 도시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뭄바이는 영국 식민지 시절 봄베이로 개칭됐다가 1995년 뭄바이로 환원됐지만 인도인들은 물론 현지인들조차 여전히 봄베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 지역에서 봄베이 O형의 빈도가 상대적으로 더 높지만, 인도 이외의 지역에서도 드물게 발견된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 주변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ABO 혈액형 체계에서 부모 모두가 O형이면 자녀는 무조건 O형이지만, 배우자 중 한쪽이 봄베이 O형일 경우 A형 또는 B형의 자녀가 태어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부모 모두 봄베이 O형(한쪽이 A유전자, 상대가 B유전자)일 땐 AB형의 자녀가 태어날 수도 있어 가족관계에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여지가 매우 높다. 특이 혈액형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다.

문제는 봄베이 O형의 혈액은 A, B, AB형 등의 다른 혈액과 호환되지 않아 수혈이나 장기 이식과 같은 응급의료 상황에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Rh- O형 혈액을 급히 구하는 방송이나 문자를 접한다. 세계인의 혈액형 비율은 O형 45%, A형 35%, B형 15%, AB형 5%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A형 34.4%, B형 27.0%, O형 26.8%, AB형 11.4%(2022 병역판정검사 현황)로 유달리 O형이 적다.

더구나 서양인들은 인구의 약 15%가 Rh-형이지만, 동양인들은 약 0.5%만이 Rh-형이다. Rh-형인 사람의 혈액이 부족한 응급 상황에서는 모든 대상자에게 혈액을 제공할 수 있는 Rh-형 혈액을 필요로 한다. 대부분 주한 외국인이 혈액을 제공한 미담이 많은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나 Rh- 봄베이 O형은 혈액이 제공되더라도 다른 혈액형의 수혈에 사용할 수 없어 시간을 다투는 수술이나 수혈을 지연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매우 높다.

현재 국제수혈학회가 인정하는 혈액형의 종류 43가지 중에 ABO식 혈액형은 사람의 생명과 직접 관련되므로 중요한 혈액형임에 틀림 없다. 가족관계의 오해는 유전자 검사라는 첨단기술로 해결할 수 있지만, 상호 호환되지 않는 혈액형 간의 수혈은 치명적인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특이 혈액형에 대한 지식 보급도 교육 현장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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