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형 논설위원, 젠더뮤지엄코리아 관장

기계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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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둘러싼 현실과 사회의 태도는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 올해 설을 보내는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착잡했다. 저출생의 해결을 위해 여성도 군대에 징집해야 한다는 어느 젊은 정치인의 선거공약 때문인지, 2006년부터 2021년까지 280조를 투입하고 그 후 50조(2022년)와 48조(2023년) 예산을 퍼부어도 저출산 문제를 막을 수 없었다는 관련자들의 무책임한 발언 때문인지, 아이를 낳으면 1억의 출산장려금을 준다는 모 기업 회장의 발언 때문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저출생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대응으로는 결코 저출생도 저출산도 막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는 것, 그리고 키운다는 것은 온 우주가 함께 거들어야 하는 일이다. 여성은 잉태의 순간부터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고, 출산과 육아의 과정은 매 순간 생명이 잘 크도록 고군분투하는 작업의 연장이다. 설혹 자녀가 성인이라 하더라도 나쁜 일에 연루되면 부모가 욕을 먹는 한국사회를 염두에 둔다면, 부모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는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출산육아 장려금으로 1억을 던져주고 집을 마련해 준다고 해서, 부모 되기를 결심하거나 저출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잠깐 출산율이 올라갈 수도 있으며, 저출산의 원인이 경제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변화, 혈연가족과 연동하여 존속되는 사회제도의 균열, 원자화되는 개인들의 사회가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젊은 세대는 점점 결혼도 출산도 힘겨워할 것이며 조상님 제사는커녕 부모의 제사에도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곳곳에서 발견되듯이 한국에 시집온 결혼이주 여성들에게 한국인 부모 공양을 맡기며 출산을 강요하고 전통과 공동체의 가치 운운하는 현실은 지속될 수 없다. 공동체의 가치나 전통의 유산은 교과서에 나오는 말이다. 완전히 다른 해법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러던 차에 몇 년 전 너무나 진지한 모습으로 질문하던 슈테파니아의 모습과 히티사우여성박물관의 전시회가 떠올랐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조남주 작)을 읽었는데요. 한국 여성의 현재 상황을 묘사한 것인가요? 현실을 잘 반영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정말이지 너무 우울한데요? 하지만 이해할 수 있어요.”

슈테파니아는 오스트리아 서쪽 끝 브레겐저발트에 자리 잡은 작은 산간마을 히티사우 여성박물관의 관장이다. 인구가 채 2000명이 안 되는 이곳은 박물관의 나라라고 부르는 오스트리아의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박물관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이 박물관 하나가 마을 전체를 먹여 살린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브레겐저발트 지역의 중심이 되었다. 2020년 7월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떨치기 시작하던 때에 이 박물관은 창립 20주년을 기념하며 ‘출산문화: 출산, 출생 Bitrth culture: giving birth and being born’ 전시회를 열었다.

‘출산문화: 출산, 출생(Bitrth culture: giving birth and being born)’ 전시회 모습. 히티사우여성박물관 2층 전시관. ©frauenmuseum hittisau
‘출산문화: 출산, 출생(Bitrth culture: giving birth and being born)’ 전시회 모습. 히티사우여성박물관 2층 전시관. ©frauenmuseum hittisau

코로나로 인해 상실, 별리, 절망의 분위기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을 때,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접경에 위치한 마을 히티사우에서 발신하는 ‘인간 탄생’의 주제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죽음이 압도하던 시기에 생명의 탄생을 노래한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코로나 확산으로 인해 모든 박물관들이 문을 닫던 시기라 대안적인 문화공간을 고민하던 때였기에 히티사우여성박물관의 전시는 내게 매우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그 후 히티사우여성박물관의 ‘출산문화’ 전시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우크라이나의 키이우, 이탈리아의 메리노, 독일의 퓌르트 등 작년까지 순회전 형태로 진행되었다.

'82년생 김지영’ 독일어판(2021년 2월 11일) 표지. https://www.amazon.co.uk/Kim-Jiyoung-geboren-1982-Roman/dp/3462053280
'82년생 김지영’ 독일어판(2021년 2월 11일) 표지. https://www.amazon.co.uk/Kim-Jiyoung-geboren-1982-Roman/dp/3462053280

슈테파니아는 내가 활동하는 국제여성박물관협회(IAWM)의 이사로서 생명의 탄생, 여성의 출산, 그리고 여성의 재생산권이라는 주제를 함께 공유하는 오랜 동료이기도 하다. 알려져 있듯이 ‘82년생 김지영’은 2016년 민음사에서 출판하였다. 2018년 봄 대만에서 가장 먼저 번역본이 나왔고 그 후 일본어(2018), 중국어(2019), 영어(2020) 등으로 번역되었다. 영어본이 나왔던 2020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2020년 반드시 읽어야 할 도서 100권 안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독일어판은 2021년 2월에 출간되었는데, 그해 독일 아마존 온라인판매에서 사회소설 분야 5위를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놀라운 것은 히티사우박물관에서 이 책을 함께 읽고 독서토론회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한국의 소설 한 권이 오스트리아 산간벽지 히티사우 여성들의 흥미를 끈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소설은 주인공 김지영이 성장하는 내내 겪었던 성차별, 악착같이 공부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힘겹게 얻은 직장을 출산과 함께 그만두어야 하는 선택, 불편한 상황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가는 과정, 독박육아를 감내하는 가정주부로서 각종 무상노동과 감정노동에 시달리다가 심화된 정신우울증, 그리고 마침내 추석날 시댁에서 죽은 친정어머니의 목소리로 시어른들을 꾸중하는 미친 며느리로 변모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나는 처음에는 독일어권 독자들이 이 책을 얼마나 공감하면서 읽었을까 의구심을 가졌지만, 시대와 공간을 달리해 약간의 편차는 있다 하더라도 여성이 당면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고 많이 닮아 있다는 점을 그들이 공유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82년생 김지영’은 결혼, 출산, 육아, 가부장적 가족관계의 매 순간을 감내하다가 미쳐버린다. 책의 인기에 힘입어 영화도 나왔고, 그 사이에 이 작품을 둘러싼 수많은 담론이 쏟아졌지만, 결혼, 출산, 육아를 둘러싼 우리의 현실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어떤 이들은 그게 수천 년 이어져 온 여성의 일상인데 미쳐버릴 일인가, 미친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하는 냉소에서부터 문학적 작품성이 결여되고 부수적인 사실들을 침소봉대하여 한국 사회를 너무 비관적으로 그려냈다는 비판, 남성 일반에 대한 편협하고 적대적인 시선을 부추긴다는 비난, 그리고 이 책을 남자 버전으로 패러디한 ‘82년생 김지영 그리고 90년생 김지훈’ 등 무수한 패러디는 궁극적으로 여성 혐오를 부추기거나 젠더갈등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전통사회에서는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을 비롯해 돌아가신 부모님 제사를 준비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었고, 가족의 전통을 이어가는 데 여성의 출산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살벌한 가족제도 안에서 출산은 여성들의 생존에 불가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함께 이뤄야 하는 공동체적 가치나 규범보다는 파편화된 개인들의 사회가 가속화하고, 젊은 세대일수록 어디에도 안전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느낀다. 노인 세대의 삶도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지만 아닌 척할 뿐이다.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농경시대의 대가족사회가 희생하는 여성들에게 보장했던 보증보험과 같았던 ‘어머니 신화’는 이제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너무나 복잡한 의미를 담게 된 생명의 탄생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일찌감치 저출산을 경험한 사회였던 히티사우의 여성박물관에서 발신한 메시지도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출산과 출생은 생명을 거는 위대한 일이며, 전쟁이며, 우리 사회가 오롯이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하는 일 아닌가. 더 나아가 모든 생명은 고귀하고 인간은 존엄하기에, 해외입양을 국내입양으로 돌리고, 고독사 자살을 줄이고, 미혼모를 죄악시하지 말고, 낙태보다는 피임을 장려하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하는 일 아닌가 싶다. 사실 이 조그만 영토에 5000만 명도 너무 많은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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