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보 논설위원, 한국자원순환산업진흥협회 회장

민경보 논설위원
민경보 논설위원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살갑게 지내 온 고향 친구 일곱 명이 있다. 중학교 교정에 있던 청운(靑雲) 탑 아래서 청우(靑友)회라는 이름을 지었다. 용케도 육십여 년 가까이 버텨온 친구들 사이에 몇 년 전부터 여행 한번 다녀오자는 얘기가 오갔다. 하지만 그때마다 꼭 무슨 일이 생겨 성사가 되지 못하다가 드디어 확실한 명분이 찾아왔다. 칠순 여행이다. 칠순 여행이라고 정하고 보니, 당연히 남정네만 가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를 실행에 옮기려면 앞장서는 친구가 있어야 할 텐데, 서로 눈치만 보다가 또 서너 달이 지났다. 그러다가 새해가 되고 단톡방에서 덕담을 나누던 어느 날 동해시에 사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에 내가 깃대를 잡을 테니, 자네가 전화로 타진해서 확실히 갈 사람을 우선 정하자는 것이다.

그랬더니 안타깝게도 한 명은 건강 때문에, 또 한 명은 개인 사정으로 못 가게 되어서 다섯 명이 베트남 달랏으로 여행(2월 4~8일)을 다녀왔다. 여행은 준비가 8할이라는 얘기처럼, 공항에 모이기까지 수학여행 가는 아이들같이 ‘달랏 단톡방’은 들떠 있었다. 비행기 타고 함께하는 여행은 처음인 데다 솔직히 아내 없이 며칠 밤을 보내게 된 것에 야릇한 긴장감도 들었다. 더구나 단체여행이 아닌 자유여행이었으니 말이다.

호텔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넘었다. 대장의 지시에 따라 둘, 셋으로 나누어 방을 정하고 겨우 눈만 붙이고 났더니 첫날부터 일이 터졌다. 아침에 운동 나간 친구가 방 카드키를 잃어버리고 왔다. 동선을 따라 찾아봤지만 없었다. 결국 변상했다.

이른 점심을 먹고 다른 사람들의 여행 후기에 나온 대로 환전(換錢)을 금방(金房)에서 했다. 다음 날 그래도 제법 큰 은행이 숙소 근처에 있길래 차례를 기다렸으나 은행 직원은 대놓고 ‘금화사 금방’으로 가라고 쪽지를 주었다. 경제를 잘 모르는 필자에게는 환전을 거부하는 은행과 지하경제가 한 팀으로 보였다.

달랏의 핑크성당.
달랏의 핑크성당.

두 번째 날에는 더 큰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데 총무인 친구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다며 사색이 되었다. “칠순이라고 딸이 사준 최신 폰인데”라며, 수심 가득한 얼굴에 모든 일정을 뒤로하고 하루 시작점부터 훑어보기로 했다. 택시 안에는 정적만 감돌고 친구의 한숨 소리만 가득했다. 숙소에 도착해 우리는 주위를 더듬어 살피고 친구는 숙소로 향하고, 잠시 후 폰을 들고 손을 흔들며 기쁨에 겨워하는 놈(?)을 볼 수 있었다. 여행 가방에 잘 넣어두고 애초에 들고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 모두 집에까지 휴대폰을 무사히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친구 덕분이다.

나이가 드니 수다도 늘었는지 건강 얘기에서 시작해 내밀한 가족 문제까지 그리고 긴가민가 민감해서 끄집어내지 못한 옛 얘기들까지 쏟아졌다. 몰려다니는 관광이 아니어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찻집에 퍼질러 앉거나, 관광지 그늘에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니 좋았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자취방에 모여 있는 듯했다. 고맙게도 날씨가 한몫했다. 달랏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대형 편의점 식당에서 소주와 함께하는데, 갑자기 한 친구가 “우리 이제 유효기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은 노인이야. 근데 우리보고 어른이라는 젊은이들이 있을라?” 이러는 것이 아닌가.

숙소에서 본 달랏의 주거지 풍경. 사진 민경보
숙소에서 본 달랏의 주거지 풍경. 사진 민경보

우리 고향(안동, 영주, 봉화)에서 어른은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말한다. 그래서 만나면 인사가 “집에 어른은 어떠신껴(어떠하신지요. 사투리)?”로 집안 대장 안부를 먼저 묻는 것이 인사였다. 그 당시 어른은 집안 대소사의 결정권자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 나이가 되었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어른 얘기가 있다.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른이 되자. 노인이 많으면 사회가 병약해지지만 어른이 많으면 윤택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패하는 음식이 있고, 발효하는 음식이 있듯이 영양가 있는 음식이 되자(중략).” ‘우리가 그런 어른인가?’라는 물음에 선뜻 답하는 친구가 없었다. 어른이 되려면 먼저 어른다워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큰 소리로 말하지 않기, 아는 척하지 않기, 화내지 않기, 서두르지 않기, 함부로 말하지 않기, 남 말하지 않기, “나 때는” 하지 않기, 남의 얘기 들어주기, 기다릴 줄 알기, 입에 음식 넣고 얘기하지 않기, 반말하지 않기, 공중도덕 지키기… 이러다가 한 장을 채우겠다.

어른이 없는 사회라고 한다. 어른을 비하하는 꼰대라는 말을 심심찮게 하고들 있다. 하물며 당사자들이 “그래, 우린 꼰대다. 어쩔래?”라며 엇나가기도 한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 초고령화 시대를 2025년으로 통계청은 예상하고 있다. 이제 어른이 되기 위한 교육이 필요한 시점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웬만한 동네에 다 있는 문화센터에서 어른이 되는 프로그램을 계획해 보면 어떨까.

더구나 환경교육을 받아본 적은 없을 터이다. 팽창 일로에 있는 디지털세계는 ‘데이터 센터’의 대형화로 전체 에너지의 10% 이상을 이미 넘어섰다고 한다(「‘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기욤 피트롱 지음, 갈라파고스). 우리나라 스마트폰 보급률은 95%로 세계 1위를 자랑한다. 모든 세대가 눈떠서 잠들 때까지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못한다. 걸으면서도 식사 자리에서도 멈출 줄 모른다.

만 65세가 되면 노인으로 분류되어 받는 혜택이 50가지나 된다고 어느 유튜버는 소개한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지공거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노인)’ 등극이다. 역시나 남녀노소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지하철 광경에서 에너지 절약과 소음(벨·카톡·통화소리)으로부터 벗어나는 어른스러움을 보여주기로 이번 여행에서 친구들과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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