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이성낙 논설위원
이성낙 논설위원

유럽과 미국의 다양한 미술관을 부지런히 섭렵(涉獵)하던 시절,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 그리고 미국 뉴욕의 대규모 거대 아프리카 미술관에서 다양한 조형 예술품과 조우(遭遇)하면서 아프리카 예술품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아프리카 대륙을 여러 세기 동안 식민통치하면서, 아프리카 조형예술품을 경쟁적으로 ‘싹쓸이’하듯 수집했습니다.

그렇게 ‘수탈’한 것들이 파리의 케 브랑리 박물관(Musee Du Quai Branly) 전시물이고 런던의 대영박물관(Britsh Museum)의 아프리카관이 그렇습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NY Metropolitan Museum) 역시 위의 두 박물관 못지않게 많은 아프리카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두 나라와 달리 식민 통치 역사의 부담은 없지만, 아프리카 예술품 수집 후발 주자로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사실입니다.

     거장 피카소의 작품과 아프리카 가면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사진: Google 캡처
파블로 피카소(1881~1973). 사진: Google 캡처

이러한 사실은 역설적이지만, 유럽 및 미국 문화권이 아프리카 조형 예술품에 그만큼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60년대에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자신의 작품에서 아프리카 예술의 흔적이 보인다는 얘기를 듣자 자기 작품은 자신만의 고유한 창의적 구상이라며 부인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는 그의 지명도가 절정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반론도 제기할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필자 역시 피카소를 일약 세기의 거장으로 만든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피카소를 입체주의(Cubism) 창시자 반열에 오르게 한 그 작품에 등장하는 다섯 여인 중 오른쪽 두 여인의 얼굴에서 아프리카의 탈(Mask)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1907). Oil on canvas, 233.7 x 243.9 cm, NY MoMA (자료: Google 캡처)과 부분도(오른쪽).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1907). Oil on canvas, 233.7 x 243.9 cm, NY MoMA (자료: Google 캡처)과 부분도(오른쪽).

실제로 1973년 피카소가 사망한 후, 그의 아틀리에에서 아프리카의 다양한 목각 예술품이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이로써 피카소가 아프리카 예술에 많은 영향을 얻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여도 될 듯싶습니다. (참조: 아비뇽은 프랑스의 도시명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다. 바르셀로나의 창녀가 출몰하던 뒷거리 명칭이며, 그림에 나타난 여인 역시 매춘부.)

1996년 통일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베르크그륀 박물관(Museum Berggruen)이 개관했습니다. 그곳은 피카소 작품 외에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같은 유명 작가의 작품과 아프리카의 다양한 목각 예술품을 전시해 전 세계 미술애호가들이 사랑하는 명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2001년 필자는 영광스럽게도 베르크그륀 미술관 관장 하인츠 베르크그륀(Heinz Berggruen, 1914~2007)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난 미국 국적의 미술품 거래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으로 참전했으며 종전 후에는 파리에 머물며 피카소와 가깝게 지냈다는 걸 필자는 이미 알고 있었죠. 전후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피카소 작품을 미국 미술애호가들에게 소개하고 미술시장을 개척 및 활성화한 인물로도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요컨대 그는 미술계의 ‘명사’였습니다.

특히 누구보다도 오랜 세월 피카소와 교분을 나누었기에 필자는 피카소와 아프리카 조형물 간의 연결 고리에 관해 묻고 싶었습니다.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성 건너편에 있는 베르크그륀박물관(왼쪽)과 피카소 작 ‘노란 스웨터’(Dora Maar, 1939) 옆에 선 하인츠 베르크그륀(2007년). 사진: Google 캡처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성 건너편에 있는 베르크그륀박물관(왼쪽)과 피카소 작 ‘노란 스웨터’(Dora Maar, 1939) 옆에 선 하인츠 베르크그륀(2007년). 사진: Google 캡처

“피카소의 작품 세계와 아프리카 가면(Mask) 간에 연결 고리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필자의 질문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론입니다. 그게 이곳 미술관의 한 공간을 아프리카 조형물로 가득 채운 이유이기도 하지요.” 베르크그륀과의 만남은 필자가 아프리카 조형물과 현대미술 사이의 미술사적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대의 젊은 화가 피카소는 추측건대 박물관에서 아프리카의 목각 조형물, 특히 다양한 가면을 처음 보았을 때 남다른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세계 미술애호가들이 오늘날 아프리카 목각 조형물에 담긴 예혼(藝魂)에 매료되는 이유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미술은 언제부터 서방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을까요? 아프리카 문화예술의 높은 가치를 알아보고 유럽 문화계에 적극적으로 소개한 사람은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입니다. 시인이자 소설가이면서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대부와도 같았던 그는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 사진: Google 캡처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 사진: Google 캡처

그와 관련해서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907년 신작을 파리 화단(畫壇)에 발표한 피카소가 거센 혹평을 받고 위기에 처했을 때, 기욤 아폴리네르는 홀연히 그의 새로운 시도를 설득력 있게 옹호했다고 합니다. (Guillaume Apollinaire《입체파 화가(Les Peintre cubistes)》(Eugène Figuière Éditeurs, 1913). 아폴리네르는 새로운 예술정신, 즉 모더니즘의 길을 개척한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아폴리네르, '새로운 시대정신(L'espirit nouveau, 1918)', 이처럼 미적 감각이 특출했던 아폴리네르는 아프리카 예술, 특히 목각 미술품의 특유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는데, 그의 이런 아프리카 예술 사랑을 피카소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부터 세계 미술애호가들이 아프리카의 목각 미술품에 차츰 눈을 돌리기 시작했으니, 오늘날처럼 아프리카 예술에 관심이 커진 것은 아폴리네르와 피카소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사에 남는 큰 이정표입니다.

   아프리카예술은 원시미술이 아니다

좀 다른 맥락의 이야기인데, 아프리카 예술을 ‘원시미술(Primitive Art)’이라고 칭하는 경우를 국내 몇몇 매체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는 1950년대,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에서 ‘Afro-American(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호칭 전에, ‘Black(흑인)’이라는 용어가 난무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사회는 물론 유럽에서도 ‘원시미술’ 같은 표현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유독 그런 변화의 조짐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이고, 반드시 교정해야 할 사항입니다. ‘원시미술’이라는 표현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필자는 ‘원시미술’이라는 단어 대신에 ‘순박한 예술(Pure & Honest Art)’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 예술품에서 인간의 꾸밈없는 순수함을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란 서로 다른 것이지, 좋은 문화라거나 나쁜 문화는 없다(There are just different cultures. They are neither good nor bad ones)”라는 경구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