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 원예디자인과 교수, 신구대 식물원 원장

전정일 교수
전정일 교수

대한(大寒, 1월 20일)을 막 지나 추위가 절정인 지금 날씨와는 달리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연일 뜨거운 소식이 우리를 불안함에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다. 대부분의 식물이 휴면에 들어가 고요한 모습과 달리 우리 삶은 그 어느 때보다 소란함 속에 있는 형세이다.

지구적으로는 기후 위기에 따른 폭설, 폭풍 등으로 고통 받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여러 전쟁이 끝날 줄 모르고, 남·북한의 긴장이 더 심해지는 것을 포함해 역내 국가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정치가 불안정하고 서민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큰 경제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가까이에서는 학교들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구 절벽 위기에 봉착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이렇게 수많은 고통이 생기는 근본적인 이유는 갈등이다. 기후 위기는 인간이 자연과 갈등을 일으킨 것이고, 전쟁은 신념 또는 종교적 갈등이거나 서로의 이익 때문에 일어난 갈등일 것이다.

식물을 바라보며, 갈등을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본다. 식물 세계에도 수많은 갈등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식물도 인간과 같은 생명체로서 제한된 환경과 자원을 바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연에서는 서로를 포용해 줌으로써 갈등을 없애고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여러 해 전에 멕시코의 테우아칸-쿠이카틀란(Tehuacan-Cuicatlan) 생물권보전지역에서 본 ‘세팔로세레우스(Cephalocereus spp.) 선인장’ 숲의 이국적이고 평화로운 광경은 잊을 수가 없다. 세팔로세레우스는 한 종(種)이 아니라 그보다 단위가 큰 ‘속(屬)’으로, 멕시코 지역이 원산인 여러 종이 있다. 대부분 원기둥 모양으로 자라며 가지가 갈라지고 높이가 최대 15m, 지름이 최대 70cm까지 자라는 종도 있다. 가시가 최대 5cm까지 자라는 종도 있다.

멕시코 테우아칸-쿠이카틀란 생물권보전지역의 세팔로세레우스 선인장 숲. 이국적인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사진 전정일
멕시코 테우아칸-쿠이카틀란 생물권보전지역의 세팔로세레우스 선인장 숲. 이국적인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사진 전정일

이와 비슷하지만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선인장이 있다. ‘사구아로’ 또는 ‘사와로’라고도 불리는 변경주선인장(弁慶柱仙人掌, Carnegiea gigantea Br. & R.)이다. 미국의 애리조나주, 멕시코의 소노라주 등지에 서식하는데, 우리에게는 미국 서부 영화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며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사과로(Saguaro)’라고 부르는데, 마요족 인디언들이 부르는 이름이 스페인어를 거쳐 영어로 전해진 것이다. 한국에서는 '사와로'라는 잘못된 발음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弁은 ‘고깔 변’ 자다.

변경주선인장은 수명이 긴 편이어서, 흔히 150년 이상 살아간다. 보통 75~100살에 가지가 자라나기 시작하지만, 어떤 개체는 죽을 때까지 가지가 자라나지 않기도 한다. 키가 가장 크게 자랐던 개체는 23.8m를 기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변경주선인장은 상당한 양의 빗물을 흡수하여 저장할 수 있는데, 비가 많이 내려서 몸에 물을 가득 머금은 변경주선인장의 무게는 1500~2200kg까지 나간다고 한다. 물을 머금으면 눈에 띌 정도로 부풀어 오르며, 필요할 때 그 물을 천천히 사용한다. 이러한 특성 덕택에 아주 건조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뜨거운 태양을 배경으로 서 있는 ‘변경주선인장’ 또는 ‘사구아로’. '선인장호텔'로 불리는 이 선인장 줄기에 새들이 구멍을 뚫어 보금자리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 전정일.
뜨거운 태양을 배경으로 서 있는 ‘변경주선인장’ 또는 ‘사구아로’. '선인장호텔'로 불리는 이 선인장 줄기에 새들이 구멍을 뚫어 보금자리로 활용하고 있다. 사진 전정일.

몸에 물을 오래 머금는 특성을 바탕으로 변경주선인장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다양한 동물들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꽃가루받이에 꿀벌을 포함해서 낮에 활동하는 여러 종류의 새들의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밤에 활동하는 박쥐까지 활용한다. 꿀벌과 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며 도움을 받는 것인데, 박쥐의 경우는 이 선인장의 꽃가루를 먹으면 젖이 잘 분비되어 새끼를 키우는 데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은 이 선인장의 열매를 식용으로 소중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선인장즙으로 만든 음료 또한 중요한 의식에 사용할 정도로 귀중하게 여긴다. 이렇듯 변경주선인장은 그 지역에서 많은 생물의 삶을 좌우하는 힘을 가진 것이다.

변경주선인장의 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선인장을 흔히 '선인장호텔'이라고 부르는데, 변경주선인장의 가장 멋진 특성을 잘 알려주는 이름이다. 사실, 이 선인장은 호텔 이상의 쉼터 역할을 한다. 줄기를 자세히 보면 크고 작은 많은 구멍이 뚫려있는 게 눈에 띈다. 여러 종류의 새들이 파놓은 구멍이다. 힐라딱따구리, 멕시코양진이, 보라큰털발제비, 금색딱따구리 등 다양한 새들이 변경주선인장에 서로 다른 높이로 구멍을 파고 살아간다. 구멍의 높이뿐만 아니라 크기나 깊이도 집을 만드는 새에 따라 달라진다.

변경주선인장은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한 채 몸에 크고 작은 수많은 상처를 참아가면서 봉사함으로써 새들을 포용한다. 변경주선인장이 많은 생물의 삶을 좌우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바로 이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포용’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선인(仙人)은 사람이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상상의 인물이다. 선인장(仙人掌)을 문자 그대로 풀면 그런 선인의 손바닥이라는 뜻이 된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분야, 특히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사구아로’라는 ‘선인’의 포용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다음 글은 2월 8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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