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선 논설위원, 기업&경제연구소장, 연세대 경영대 연구교수

이주선 논설위원
이주선 논설위원

제22대 국회의원 선거(4월 10일)는 민주화 이후 열 번째 총선거로, 국회의원을 민주적 절차에 따라 ‘다수결’로 선출한다. 민주화 전 우리나라 정치체제는 권위주의 독재체제였다. 민주화 이전까지 많은 사람이 민주화가 우리의 모든 문제와 질곡을 해결할 거라는 낭만주의적 기대감을 가졌다.

실제 우리는 민주화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회복했다. 또 언론·출판·결사·표현·사상의 자유도 최상의 수준으로 보장되었다. 삼권분립의 훼손과 공권력의 시녀화, 군의 정치 개입과 쿠데타, 정경유착, 언론·노동 탄압 등 다양한 비정상 상태가 정상 상태로 회복되었다. 이런 정상적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으로 선진국 진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민주화와 선진화에도 불구하고 정치인과 정치권력 또는 공무원과 국가권력으로 통칭되는 권력구조에서 발생하는 자의적 권력 행사와 오남용 폐해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또 정치인들의 선거과정에서의 다양한 반칙과 변칙, 불법적 여론조작과 가짜뉴스, 비열하고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점철된 저급한 정쟁, 다수 양당 위주 담합구조로 인해서 국민의 의사와 상관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자유민주주의를 퇴보시키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좀먹고 있다.

지금도 여야 다수 정당에서 많은 범법자가 국민을 대표할 유력 후보자들로 활보하고 있다. 자신의 범법행위를 견강부회하며, 사법절차의 성긴 그물망이나 권력의 특권을 이용하거나 강성 지지층을 방호벽으로 공권력에 저항하는 자들이 정당을 쥐락펴락하고, 공천권을 무기로 정당 내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권력 장악자들의 가족과 친인척이 발호하여 일탈행위를 저지르고, 그 견제장치 도입을 차일피일 미루며 사과조차 하지 않는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에 더해서 문제가 불거지고 확대되는 걸 무마하려고 권력으로 힘겨루기를 해서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는 확대 중이다.

이 상황에서 꼭 주목할 것은 특정 정당의 국회 의석 일방적 다수 차지가 주권자인 국민의 권리와 자유에 심각한 제약과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지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는 3분의 2에 가까운 의석을 더불어민주당에 몰아 주었다. 그런데 지난 4년간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그러면 여당인 국민의힘은 과연 다를까? 직접 보지 않았지만 아마 지금 야당이 하는 짓거리와 유사한 짓을 하며 세월을 허송하고, 권력자들의 오만과 방자가 하늘을 찌를 가능성이 크다.

이미 1887년 영국의 액튼 경(Lord John Dalberg-Acton)이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으며,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설파했듯이,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누구도 절대 권력을 가지면 그가 ‘대리자(agent)’라는 것을 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심지어 그는 주인인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공권력으로 억압하는 다양한 술수들을 획책한다. 민주주의 선거로 집권해서 공권력을 이용해 민주적 제도를 무력화해서 독재권력을 장악·항구화한 도둑놈들인 히틀러, 푸틴 등 독재자들이 대표적 본보기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 신장에 핵심적 역할을 하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궁극적 수단은 아니다. 이는 그 옹호 논거가 아무리 강력해도 민주주의 자체가 절대적 가치가 될 수 없고, 그것이 성취한 것으로 가치가 판단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조셉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그의 책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에서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는 정치적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제도의 한 유형일 뿐, 주어진 역사적 환경에서 그 결정과 무관하게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을 ‘자유로 가는 길’로 간주했던 사람들은 일시적 수단을 궁극적 목적으로 착각한 것이다.

사람의 집단은 스스로 법을 정해서가 아니라 같은 행동규범을 따름으로써 공동체가 된다. 집단행동이 필요할 때, 그 결정방법으로 민주주의가 최상일 것으로 추정되나, ‘집단적 통제의 확대 여부’는 다수결이 아니라 그 공동체가 미리 모두 동의해서 만든 원칙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민주적 결정의 권위는 같은 신념을 공유하며 뭉친 공동체의 다수가 결정한 것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다수결이 제약 없이 공동체에 속한 개인의 자유와 권리 제한의 최종 근거가 될 때, 민주주의는 더 이상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그러면 이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도구로 전락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 없는 민주주의’의 말로가 바로 이렇다.

예컨대 북한이나 중국은 자신들의 체제를 인민민주주의라 하는데,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이라는 교조적 민주주의 관점으로 보면, 프롤레타리아(무산대중)는 다수이고 이들이 선택한 모든 것은 다수결이므로 민주주의라고 강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다수의 횡포로, 같은 신념을 공유하지 않은 소수의 자유와 권리를 일방적으로 제약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이런 다수의 소수에 대한 일방적 탄압을 용납하지 않으며, 정치적 소수가 지금은 소수여도 미래에는 다수가 될 수 있는 상태를 상정한 정치체제다. 그러므로 이를 부인하는 정치제도의 양태를 ‘민주주의’로 이름 붙이더라도 전체주의 독재체제로 규정한다.

우리는 이번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정치인들이 그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신념으로 우리를 대표할지 단호하게 물어야만 한다. 이 정체성이 훼손되면 정치의 모든 문제 해결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 나라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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