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이성낙 논설위원
이성낙 논설위원

휠체어를 타고 음성 합성 시스템으로 세상과 소통하던 사람, 그 존재만 어렴풋하게 알려졌던 블랙 홀(Black Hole)의 열에너지에 관한 연구로 우주의 신비에 다가간 물리학자, 수많은 강연과 저술로 과학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아이들에게 과학자의 꿈을 갖게 한 인물…. 바로 스티븐 호킹(1942~2018) 박사입니다.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몸을 혼자 가누지 못하던 스티븐 호킹 박사. 사진: Google 캡처
몸을 혼자 가누지 못하던 스티븐 호킹 박사. 사진: Google 캡처

 

운동을 좋아하고 농담을 즐기던 그가 병을 얻은 것은 스물한 살 때였습니다. 그 후 길어야 2년밖에 생존하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선고에도 불구하고 55년을 더 살며 인류에게 많은 감동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루게릭병(Lou Gehrig’s disease) 때문에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기계와 사람들의 도움으로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호킹 박사는 자신의 분야에서 이룬 탁월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1979년 케임브리지의 루카스 석좌교수(Lucasian Professor of Mathematics)에 임명되어 봉직하다 2009년에 물러났습니다. 석좌교수로 지낸 30년 동안 대학 측은 ‘만유인력의 법칙(Law of Universal Gravity, 1687)’으로 유명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 쓰던 방을 스티븐 호킹에게 배정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에 대한 영국 사회의 존경의 징표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호킹 박사가 1990년 시사저널 창간 1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호킹 박사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젊은이와 학생들을 위한 강연을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필자는 한달음에 달려가 연단 맨 앞자리에 앉아 그의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난 후 시사저널 발행인이었던 고 박권상(朴權相, 1929~2014) 씨의 호의로 호킹 박사와의 식사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운 좋게도 필자는 호킹 박사 맞은편에 앉아 식사하며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는 휠체어에 달린 컴퓨터 장치를 이용해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컴퓨터에서 무언가를 검색할 때 단어 일부를 치면 연관어가 뜨고 그중 하나를 선택해 검색하듯 호킹 박사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일일이 검색해 그 단어를 음성으로 지원받아서 상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단어를 하나하나 찾아야 했기 때문에 대화하는 데 시간이 걸렸음은 당연합니다.

김치를 먹는 호킹 박사를 보고 “김치가 맵지 않나요?”라고 필자가 묻자, 그는 “뜨거운 것이 좋아!”라고 유머러스하게 대답하며 빙긋이 웃었습니다. “Some Like It Hot!”은 과거 마릴린 먼로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죠. 그의 재치 있는 응답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필자는 그날 영국 사회의 일면을 보았습니다. 몸이 불편한 호킹 박사를 위해 좌우에서 남녀 간호사가 번갈아 가며 음식을 입에 넣어 먹여주었습니다. 호킹 박사는 자기 얼굴을 혼자 가눌 수 없었죠. 그래서 한 도우미가 그의 얼굴을 바로 받치고 있으면 다른 도우미가 음식물을 입에 넣어주곤 했습니다. 그걸 바라보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인권 의식이 높지 않던 때라 “몸 불편한 사람이 집에나 있지, 왜 돌아다녀?”라는 힐난을 곧잘 듣곤 했습니다. 따라서 호킹 박사의 이러한 행보는 영국 사회가 그때 이미 장애인에 대한 차별 의식이 거의 없었음을 바로 보여준 예이기도 합니다. 호킹 박사는 바로 그런 영국 사회가 만들어낸 거인이었습니다.

        로만 헤어초크(Roman Herzog)

통일 독일 초대 대통령 로만 헤어초크. 사진; Google 캡처
통일 독일 초대 대통령 로만 헤어초크. 사진; Google 캡처

1994년 통일 독일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로만 헤어초크(1934~2017, 재임 1994~1999)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정치가로 기억됩니다. 헤어초크 대통령이 1998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독협회 일을 맡고 있던 필자는 그가 주최하는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필자가 설레는 마음으로 초대에 응한 것은 헤어초크가 독일 대통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그가 했던 말, 그리고 그가 했던 행동에 크게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소비에트 연합(이하 소련)은 포츠담회담(Potsdam Conference) 합의에 따라 국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독일 북부의 도시이자 칸트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를 점거한 후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따 그곳을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로 바꾸는 한편, 남쪽에서는 체코의 영토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소련은 이때 체코의 영토를 점령하는 대신 독일 동부의 쥐데텐(Sudeten) 지역을 체코에 넘겼습니다.

이 사태로 하루아침에 국적이 바뀌어버린 쥐데텐 주민들은 서독의 바이에른(Bayern) 지역으로 대거 이주했습니다. ‘쥐데텐 도이치(Sudeten Deutsch)’라 불리는 그들은 1960년대에 뮌헨과 프랑크푸르트를 비롯한 대도시에 모여 자신들을 고향으로 보내달라는 시위를 벌이곤 했습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되자 쥐데텐 도이치들은 새 정부에 “우리 땅을 돌려달라, 우리 땅을 탈환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습니다.

이때 헤어초크 대통령은 “독일의 국경은 현재의 상태에서 한 치도 밖으로 확대될 수 없고, 오늘 독일의 국경은 그 자체로 존재할 뿐 옛날로 돌아가지 않는다”라고 선언했습니다. 필자는 그런 헤어초크 대통령의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 소신이 놀라웠습니다. 그 후 쥐데텐 도이치들의 요구는 잠잠해졌습니다. 아마도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은 그의 말에 크게 감동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995년 5월 1일, 독일 의사당에서 나치 패망 50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이때 헤어초크 대통령이 행정부를 대표해서 한 연설 또한 필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후세에 물려줄 것은 나치의 만행을 한 글자도 고치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역사적 사명이자 과제이다.”

그런 기억을 간직한 채 필자는 모임에 참석했고, 호텔 정원에서 환담할 때 “각하, 저는 각하께 경의를 표하러 왔습니다”라고 서두를 꺼냈습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이유를 이야기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 감동적인 연설을 언급했습니다. 새삼 종교철학을 전공한 그의 성찰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던 만남이었습니다.

     빌리 브란트(Willi Brandt)

필자에게는 20여 년 독일에 거주하면서 목격한 가장 충격적인 정치적 사건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동독이 1961년 8월 13일 느닷없이 베를린 장벽(Berliner Mauer)을 설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74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1913~1992, 재임 1969~1974)의 하야에 얽힌 정치스캔들입니다.

‘장벽’의 출현을 놓고 독일 사회는 한동안 공포 분위기 속에서 요동쳤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국제 상황’임을 인정하고, 이내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갔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독일 총리실이 동독에서 계획적으로 침투시킨 고정간첩과 연루된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이는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 정책을 펴며 동독 공산 정권과 거리를 좁히려 부단히 노력해왔기에 더욱더 독일 사회를 아연실색케 했습니다.

당시 빌리 브란트 총리는 자신이 주창한 신동방 정책(Neue Ostpolitik)의 기치 아래 소련은 물론 이웃한 폴란드를 방문해 그 유명한 참회의 ‘무릎 꿇기(Kniefall, 1970)’를 했는가 하면, 동서독 간의 팽팽하기만 하던 긴장 관계를 보란 듯이 뛰어넘어 동독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1970. 3. 19). 국제적 냉전 시기에 보여준 이런 행보를 인정받아 빌리 브란트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빌리 브란트 총리의 개인 보좌관 기욤(오른쪽)은 간첩이었다. 사진: Google 캡처
빌리 브란트 총리의 개인 보좌관 기욤(오른쪽)은 간첩이었다. 사진: Google 캡처

그런데 빌리 브란트 총리의 개인 보좌관인 기욤(Günter Guillaume, 1927~1995)이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Stasi)에서 파견한 간첩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서독 사회는 놀라움과 격분의 도가니에 휩싸였습니다.

특히 총리실에서 다룬 각종 국내 보고서는 물론 주요 외국 정상과의 교신 자료도 기욤의 손을 거쳐 동독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에 독일 사회는 격앙하였습니다. 이는 빌리 브란트 개인의 단순한 실책을 넘어 국가의 기강을 흔든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의 모든 언론 매체가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특히 빌리 브란트가 그런 간첩을 최측근으로 채용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며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그 결과 빌리 브란트는 사건이 터지고 한 달여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 사회를 돌아보면 생각보다 조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엇보다 “빌리 브란트는 물러나라!”와 같은 시민들의 격한 시위나 무력 충돌이 없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빌리 브란트는 총리직에서 불명예스럽게 하야한 뒤에도 독일연방의회(Bundestag)의 의원직을 계속 유지한 것은 물론 1987년까지, 즉 13년간 사회민주당(SPD) 총재로서 당을 계속 이끌며 정치인의 역할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라면 이런 활동이 과연 가능할까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스티븐 호킹, 로만 헤어초크, 그리고 빌리 브란트는 현대사에 뚜렷한 궤적을 남긴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역사적 거인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사회가 그들을 그런 거인으로 만들어낸 측면도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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