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논설위원,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권오용 논설위원
권오용 논설위원

외환위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며 우리 경제에 다시 자신감이 붙을 무렵인 1999년 6월 전경련은 사회공헌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기존의 기업재단협의회를 발전적으로 승계해 전경련 회장단이 위원장을 맡는 공식기구로 승격시킨 것. 초대 위원장은 회장단 중 홍일점인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 맡았다. 재계로서는 그때까지 소극적, 수동적으로 대처하던 기업의 사회공헌에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고 능동적으로 활동해 보겠다는 뜻깊은 시도였다. 아울러 외환위기에 기업도 책임이 있다는 사회 일각의 지적을 수용해 개별 기업뿐 아니라 경제계 공동으로 사회의 그늘진 곳, 소외된 이웃을 찾아 나서겠다고 해 큰 관심을 받았다.

위원회의 출범을 준비하면서 지인을 통해 당시 영부인이었던 이희호 여사의 참석을 타진해 봤다. 역대 다른 영부인들에 비해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던 터라 참석 자체만으로 의미 있는 메시지가 사회에 확산되리라 기대했다. 요청을 하자마자 비서실을 통해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하며 김대중 대통령과도 상의했다고 알려왔다. 참석 자체에 반신반의했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사라지고 이제는 VIP가 참석하는 큰 행사가 됐다.

행사를 준비하면서 김우중 회장께 외국의 기업사회공헌 사례를 사전에 보고했는데, 미국의 ‘United Way’에 큰 관심을 보였다. 자선에 관심은 있으나 방법을 모르는 기부자, 활동가들을 대신해 기부처나 활동 무대를 소개해 주는 단체였다. 그러면서 대우그룹은 사회공헌에 많은 돈을 쓰고 있는데 대부분 강요에 의해 뜯기는 편이라 이런 기구가 있으면 최소한 뜯어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또 기업들이 정치권 등 외부의 요청이 있으면 United Way 같은 전문기구에 자문해 성금의 기탁 여부를 결정하자고도 했다. 그리고 기업들이 공동으로 사업을 하면 규모도 커져 국민들에 대한 홍보효과도 크겠다고 했다. 힘 있는 권력의 개입도 공동으로 차단해 낼 수 있겠다며 기대를 표명했다. 한마디로 한국판 United Way를 세우고 그 실행본부로 전경련 사회공헌위원회를 지목하는 원대한 구상이 펼쳐졌다.

영부인이 오신다니 예산도 많이 투입됐고 각 기업들도 열심히 자료를 보내왔다. 그런데 행사 전날 청와대에서 영부인 옆에 좌석을 하나 더 준비해 달라고 했다. 대통령께서 오시나 하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영부인께서 어느 지인을 한 분 더 모시고 간다고 했다. 정치인 출신으로 여성운동을 쭉 해온 여성단체 회장이었다. 왜 오나 의아했지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행사는 잘 됐다. 영부인도 흡족해했고 많은 회장단도 만족하며 잘 하자고 했다. 그런데 저녁 무렵 5대 그룹에 각 1억씩, 총 5억 원을 갹출해 그 여성단체에 기부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니까 그날 영부인이 데리고 온 여성단체 회장이 즉석에서 회장들께 요청했고, 5대 그룹은 영문도 모른 채 묻지마 기부를 한 셈이 됐다. 그런 짓 하지 말자고 사회공헌위원회를 출범시키는데 바로 그런 일을 한 셈이 됐다. 씁쓸했다. 출범 첫날부터 위원회가 막아야 할 일을 앞장서서 한 셈이 됐다. 자괴심이 들었다.

전경련 사회공헌위원회는 이런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 속에 출범했다. 그러나 출산의 원죄 탓인가, 가장 적극적이었던 김우중 회장은 정권의 미움을 사 기업이 공중분해됐고 장영신 회장은 정치에 입문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정치활동마저 접게 됐다. 결국 사회공헌위원회는 미르·K재단 설립의 후유증으로 2017년 2월 문을 닫고 간판을 내렸다.

사회공헌위원회는 경제계 공동사업을 추진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기업별로 사회공헌위원회가 설립되고 전담 부서가 세워지는 데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 체계적으로 정비되고 사회적 가치의 측정 등, 성과 위주로 재편되는 큰 계기가 됐다. 2022년 매출액 기준 500대 기업의 사회공헌 지출액이 3조 5367억 원으로, 조사를 시작한 이후 최대 규모로 성장한 것도 이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비록 출생의 비밀은 있었지만 출중한 업적을 쌓은 드라마 속 주인공같이 전경련 사회공헌위원회는 왔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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