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논설위원, 전 한국일보 심의실장

정숭호 논설위원
정숭호 논설위원

서문; 여의도 문법이 다시 사람들 입에 심하게 자주 오르내리고 있으되 아직 그 뜻을 잘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 차제에 정리해두면 여러 사람이 편할 것이로다. 연이나, 이 글 쓰는 사람 또한 그쪽에 몸담은 적 없어 이 문법을 논함에 깊이가 얕으니 우선 누항의 저잣거리에서 얻어들은 것에 ‘여의도 문법의 기초’라는 이름을 붙여 내놓노라. 다만 상세하고 정확하며 내용 풍부한 ‘여의도 문법’ 참고서는 정통한 후학들이 심혈을 기울여 ‘정통 여의도 문법’ 혹은 ‘성문 여의도 문법’과 같은 이름으로 이른 시일 안에 내놓을 것으로 기대하노라. 그리하여 우리 백성들이 잘못된 문법을 감별함에 불편함이 없기를 바랄 따름이니라

1. 정의; 여의도 문법은 여의도가 주 무대인 정치인(국회의원)들이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 경제적 이익을 누리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 규칙 혹은 그 체계를 말한다.

2. 특징; 여의도 문법의 가장 대표적 특징은 기만적이며 배타적이라는 점이다. 아름답고 순수한 한국어를 왜곡해서 사용할 때가 많으며, 칭찬과 배려보다는 비난과 비방, 경멸과 무시에도 아주 종종 사용된다. 거짓말과 억지도 여의도 문법의 특징이다. 여의도 문법에 따른 언어생활을 하는 국회의원들이 ‘내로남불’의 표상이 된 것은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이다.

3. 사용자: 300명 안 되는 국회의원들이 여의도 문법의 주된 사용자이며, 국회의원 지망자나 전직 국회의원인 자들인 소위 정치 평론가, 전·현직 정치부 기자들 가운데도 이 문법을 자신들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소통 도구일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4. 사례 및 분석

a.기만적인 사례:국회의원들은 국정감사나 상임위에서 상대 당 출신 의원이나 위원장에게 “존경하는 ○○○의원님!” 혹은 “존경하는 ○○○위원장님!”으로 질문이나 발언을 시작한다. 그러나 국감이나 상임위를 한 번이라도 구경해보면 이게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 곧바로 알게 된다. 뒤따르는 질문이나 발언은 존경은커녕 상대방 발언을 트집 잡고 모욕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b.국민을 참칭하는 사례: 국회의원들은 ‘국민’을 자기 발언이나 질문의 논거로 삼는다. 이를테면, 자기가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면 “국민을 대신하여 묻는 겁니다. 바로 대답하세요”, “국민을 속이려는 겁니까?”라며 답변대에 나선 사람들에게 삿대질하며 호통친다. 그러나 정작 국민은 그가 제기한 문제에 관심이 없다. 그 의원과는 정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국민도 있는데 무조건 ‘국민’을 앞세워 자기 말을 이어간다. 국민의 이익보다는 자기편 이득을 추구하면서 국민을 앞세우는 건 국민을 ‘호구’로 알기 때문이다.

c.거짓과 뻔뻔스러움: 여의도 문법으로 작성된 ‘어문’에는 가짜가 아주 많다. 잠깐이면 진위가 확인되는 가짜뉴스를 진짜인 양 의사당에 풀어 놓는다. 잘못을 추궁당할 때도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금방 드러날 줄 알면서도 태연하게 거짓으로 응답한다. 뻔뻔스럽기 그지없고 그들이 과연 우리와 같은 인간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하는 태도이다.

d.사과가 없는 문법: 자신의 발언과 질문이 틀린 것이며 근거 없는 헛소리임이 드러나도 이 문법 사용자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문법에는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를 구합니다”가 없다. 이들은 ‘유감’이라는 말로 이를 대신하는데, 사실 ‘유감’은 有感이건, 遺憾이건, 미안함과 죄송함을 표현할 때 쓸 말은 아니다. 有感은 ‘느끼는 바가 있다’는 뜻이며, 遺憾은 ‘마음에 차지 않아 섭섭하거나 불만스럽다’는 뜻이다. 즉 유감에는 미안, 죄송, 사과의 뜻이 없다. 그럼에도 ‘유감을 표한다’는 오만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국민의 염장을 지르는 건 무식해서가 아니라, 국민 알기를 우습게 알기 때문이다. “내가 왜 사과하냐? 그게 사과까지 할 일이냐? 시끄러우니까 그냥 이 정도로 넘어가자!”가 ‘유감을 표하는’ 여의도 문법 사용자들의 속뜻인 거다.

(이상의 사례에서 정치인의 실명과 구체적 내용을 상술하지 않은 것은 그런 것이 너무나 많아서 선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향후에 나올 ‘정통 여의도 문법 총정리’에는 이 같은 미흡한 점이 충분히 보완되어 있을 것으로 믿는다.)

5. 여의도 문법의 기원: 여의도 문법이 생겨난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국회의원들이 자기네 외에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예전 DJ정부 때 총선 출마 준비를 하던 한 실세 장관이 기자들에게 “저것들이 국회의원이 아니면 사람 취급을 안 해. 자기들만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게 아니꼬워서 나가려고 해. 인간 안 된 건 저희면서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울분’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대정부 질의에서 겪은 의원들의 막무가내, 근거 없는 호통, 말 자르기 등등에 치가 떨렸다는 거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지만 총선 때만 되면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비서관 수십 명이 사표를 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6. 여의도 문법에서 가장 나쁜 문장과 어휘: 여의도 문법에서 가장 먼저 지워야 할 문장은 “너네는 정치를 몰라”이다. 여의도 문법을 사용하는 무리는 “정치는 우리가 하는 것이고,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우리가 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돼!”라는 생각이 강고하다. 그러면서 지켜보는 방법을 알려준답시고 국민적 관심사가 된 정치 사안에 대해 ‘관전포인트’라는 걸 짚어준다. 이런 사고와 행동은 여의도 문법을 사용하는 자들과 국민 대중을 주인공과 구경꾼으로 분리시킬 뿐이다. 국민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관전자로 전락시키려는 술책이다. 자기네들만 정치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망상을 이런 언술로 실현하려는 것이다. 정치의 주인공인 국민이 왜 객석에서 구경만 해야 하는가? 공공선을 이루려는 사람은 여의도 문법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더 많다는 걸 그들은 왜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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