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 원예디자인과 교수, 신구대 식물원 원장

전정일 교수
전정일 교수

1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인 동지(12월 22일)가 엊그제 지나갔다. 동지를 지났다는 말은 내년 입춘 때까지 1년 중 가장 추운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날이 춥다 보니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 모습도 어둡고 칙칙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뉴스를 통해 들리는 정치, 경제, 사회 분야 상황이 모두 어두워 주변이 더 어둡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환경이 어둡다고 해서 사람들 마음속까지도 어두워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실 필자는 언제인가부터 이때만 되면 왠지 모를 우울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곤 한다. 연말이라 바쁘게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피곤해서라고 이유를 붙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다들 아실 것 같지만 필자는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이렇게 겨울만 되면 우울감을 느끼는 것을 의학 용어로 ‘계절성 정동장애(季節性 情動障碍)’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른 말로는 계절성 우울증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계절적인 변화나 흐름으로 인해 우울감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 우울감을 느끼는 계절이 다를 수 있지만, 대개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가을부터 겨울에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은 편이라고 한다. 그 원인은 외부 환경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상하부'(視床下部)라는 뇌의 한 부분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겨울이 되어 날씨가 추워지고 해가 짧아질 때 시상하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서 에너지 부족, 활동량 저하, 과다수면(過多睡眠), 우울증 등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식물도 사람과 같은 생물이니 비슷한 경향을 보이지 않을까. 내가 아는 지식으로 식물은 감정이 없으니, 사람과 달리 식물은 우울증을 느끼지 않는 것 같기는 하다. 지금으로서는 그에 대해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우리 주변의 나무들을 둘러보면, 식물들도 겨울을 맞이하면 어둡고 칙칙한 모습인 것만은 분명하다.

산수유 꽃눈의 겉(위)과 속(아래). 겉은 어둡고 허름해도 속에는 멋진 빛을 품고 있다.
산수유 꽃눈의 겉(위)과 속(아래). 겉은 어둡고 허름해도 속에는 멋진 빛을 품고 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아주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른 봄 가장 일찍 꽃을 피우는 나무 중 하나인 산수유를 가까이 살펴보자. 여전히 겉으로 보기에는 칙칙한 색만 보인다. 조금 더 자세히 이 나무의 내면을 들여다보자. 가지 끝에 동그랗게 작은 구슬 같은 것들이 매달려 있다. 물론 어두운 색이다. 이 작은 구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각들로 감싸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안한 마음으로 조각을 하나씩 펼쳐본다. 모두 네 조각을 펼치면, 그 안에는 겉만 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빛이 가득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구슬은 식물학적으로 ‘꽃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안에 연둣빛 노란 알갱이 하나하나가 이듬해 봄에 꽃으로 피어난다. 그러니까 그 구슬 하나는 꽃다발 하나가 압축되어있는 것이다. 겉은 허름해도 속에는 멋진 빛을 품고 있다. 이렇게 빛을 품고 있는 식물은 비록 겉으로는 계절성 우울증에 걸린 내 모습 같지만, 나와는 달리 춥고 어두운 이 겨울에도 절대로 우울증에 걸릴 것 같지는 않다.

아직 이런 말을 하기에는 이른 나이인 것 같지만, 인생 전체로 볼 때 ‘나이 듦’이 혹시 겨울과 같은 상황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1년 중 겨울에 많은 계절성 정동장애와 같은 현상이 지금보다 나이가 더 들면 상시화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그렇지만, 산수유 꽃눈을 보면서 이런 두려움을 떨쳐본다. 마음속에 빛, 꿈과 이상이 있다면 환경이 아무리 어둡고 칙칙해도, 생물학적 나이가 얼마나 되었어도, 모두 상관없이 젊은이가 아닐까. 반대로 스무 살의 생물학적 나이를 가졌어도 꿈과 이상이 없다면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지 않을까.

주변에서 많은 ‘젊은 어른’들을 찾아볼 수 있다. 현직에서 은퇴한 후에 본인의 특기를 살려서 봉사하는 삶을 사시는 분들,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서 열심인 분들, 귀농해서 지역 살리기에 동참하는 분들, 악기를 배우느라 재미를 느끼는 분들, 혹은 현업을 노년에도 평생 이어가는 분들. 모두 마음속에 빛을 품은 젊은 분들이다.

동지를 지나 연말이다. 그런데, 동지는 1년 중 가장 낮이 짧은 날이기도 하니, 이후로는 밝은 낮이 길어질 일만 남아있다. 예전에는 동지를 새해의 시작으로 삼아 아주 중요시하였다고 하는데, 그 말이 이해된다. 아직 추위가 한창 기세를 떨치고 있지만, 가슴 속에 밝은 ‘빛’ 하나씩 품고 새해에도 젊은이로 살아가자.

<다음 글은 새해 1월 11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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