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 논설위원, 전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논설위원
이동식 논설위원

주드 로가 주연한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 2001)’는 1942년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지금은 볼고그라드)를 침공할 때 소련군의 전설적 저격수(sniper)로 활약한 바실리 자이체프를 다룬 영화다. 자이체프는 이 전투에서만 독일군 242명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보다 1년 전인 1941년 10월 크림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강력한 요새이자 군항인 세바스토폴을 독일군이 공격하여 열 달 동안 소련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소련군의 한 여성 저격수가 독일군 309명을 사살하여 소련군의 사기를 끌어 올린 일이 있다. 이 소련 여군 저격수가 ‘죽음의 숙녀(Lady Death)‘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루드밀라 파블리첸코다. 그녀의 이야기는 2015년에 ‘세바스토폴 전투’(국내에서의 제목은 엉뚱하게도 ‘세바스토폴 상륙작전’이었다)라는 영화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알려졌다.

루드밀라 파블리첸코
루드밀라 파블리첸코

그런 파블리첸코는 우크라이나 여성이었다. 키이우(종전엔 키예프) 대학 역사학도였던 그는 1941년 독일군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보병으로 자원 입대해 소련군 25사단에 배속돼 저격 훈련을 받았다. 파블리첸코는 오데사전투에 투입돼 약 두 달 반 동안 무려 187명을 사살한 뒤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전투에 가담했다. 1942년 6월 박격포에 부상해 전선을 떠날 때까지 소련군 공식 집계로 309명을 저격했다. 그중 36명이 적의 저격병이었다. 그는 ‘죽음의 숙녀’라 불렸지만, 아군에게는 상대 저격병을 사살한 구원의 천사이기도 했다.

영화 '세바스토폴전투' 포스터
영화 '세바스토폴전투' 포스터

우크라이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저격수 강국’이며 특히 유능한 여성 저격수들이 많았다. 러시아는 구 소련 당시인 제2차 세계 대전 중 여성 저격수 2000여 명을 배치한 것으로 유명하고 이들의 활동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The Unwomanly Face of War)'에 기록돼 알려졌는데,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출신이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크라이나의 여성 저격수들은 이제 과거 한편이었던 러시아 군인들을 대상으로 총을 겨누고 이들을 저격한다.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군인들의 학살과 강간 등 여성과 어린이들의 피해가 늘어나자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총을 들고 전장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전에 독일군을 향하던 총구가 러시아 군인들에게 향하면서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죽음의 숙녀'로 부활한 것이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얼마 전 우크라이나의 극소수 여성 저격수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37세의 두 아이 엄마 이리나(Iryna)가 고도의 훈련을 거쳐 무자비한 살인자가 된 사연을 소개했다. 키가 5피트 4인치(160cm)의 단신인 그녀가 편안한 직장을 포기하고, '죽음의 숙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조국과 가족을 지키고 싶어서"였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우크라이나 여성 저격수들이 푸틴에 맞서 싸운다'라는 제목으로 훈련 중인 우크라이나 특수부대 여성 저격수 3명을 소개하고 있다. 저격수 훈련 기간은 통상 1년 반이지만 현재 서부 숲에서 훈련 중인 3명은 몇 주 만에 벨라루스 쪽 국경에 배치된다고 한다. 저격수 양성 책임자는 처음엔 여성을 뽑는 데 회의적이었지만 여성은 가볍고 민첩하며 소리를 내지 않고 후퇴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남성보다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외신이 전하는 우크라이나 여군들의 훈련 모습
외신이 전하는 우크라이나 여군들의 훈련 모습

뉴욕포스트는 "러시아 전투기 10대를 홀로 격추시킨 `키이우의 유령` 이후 우크라이나에 새로운 영웅이 등장했다"면서 "차콜(Charcoal)이라는 가명을 쓰는 여성 저격수가 우크라이나 국민 사이에서 ‘21세기 죽음의 숙녀’로 칭송받고 있다"고 전했다. 차콜은 2017년 우크라이나 해병대에 입대했다가 지난해 초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소식에 재입대를 결정했으며 전쟁 초기 저격수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 저격수들의 활약 뒤에는 많은 여성들의 희생이 깔려 있다. 우크라이나 국방부는 우크라이나 여성 4만2000여 명이 군대에 입대해 전투에 참여해 싸우고 있고, 현재까지 107명의 전사자가 나왔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더 많은 여성을 동원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 중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우크라이나가 최근 여성의 입대 연령과 보직 등에 대한 여러 제한을 단계적으로 철폐해 여성도 전차병, 기관총 사수, 저격수, 트럭 운전사 등 역할을 맡을 수 있게 했다고 보도했다. 여성의 입대 연령 상한선도 기존 40세에서 남성과 동일한 60세로 높였다.

또한 여성이 의무 징집 대상은 아니지만, 의료 훈련을 받은 여성은 징병 대상자로 등록하도록 하는 법률도 지난달 시행됐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여성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징집 대상이 되어 전장에 투입되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전쟁이 20개월 넘게 이어진 데다, 최근 치열한 참호전으로 병력 손실이 극심해진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우크라이나 남성은 이미 지난 8월부터 무증상 결핵,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간염을 앓고 있어도 징병 대상자로 분류됐다.

극심한 병력 손실에 여성들도 전투에 차출해야 할 정도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그에 따른 전투는 러시아보다는 우크라이나에 보다 큰 부담이 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인은 "서방이 지원을 계속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죽음"이라고까지 말하면서 간절히 지원을 호소하고 있지만, 미국이나 나토는 이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어 적절한 출구를 모색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공개된 우크라이나 여성 저격수.
공개된 우크라이나 여성 저격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가 러시아 여성들의 수난을 파헤쳤다면 이 전쟁은 이제 우크라이나 여성들에게 너무나 큰 절망과 시련이다. 남편, 아들, 동생들이 전장에 나가서 죽고 다치는 것은 물론 주위의 여성들이 폭격이나 포격에 죽어 나가고 점령군인들에 의해 강간을 당하고 또 무자비하게 학살까지 당한다.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총을 들고 나서서 언제 죽을지 모를 극한상황에서 한때 같은 국민이었던 러시아의 젊은이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사랑을 실천하던 여성들이 이제 총을 들고 매일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 국가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렸지만 러시아는 키릴력(曆)에 따라 1월 7일이 성탄절이다. 지난해에는 러시아가 성탄절 휴전을 제의한 데 대해 우크라이나가 거부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는 올해 7월 법을 개정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념했다. 1917년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성탄절에서도 러시아를 지우기 시작한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법안에 서명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유산에서 탈피한다고 선언했다.  

이제 올해도 다 가고 새해를 맞는데, 이 전쟁을 일으킨 푸틴이 계속되는 전쟁으로 의미도 없이 죽어나가는 자국 젊은이나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위해 전쟁을 멈출 방도를 찾을 수는 없을까?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도 잃어버린 영토만 아니라 과거의 영토까지 회복해야 한다는 목표를 낮추어 전쟁을 멈출 방도를 찾아야 하지 않는가?

우크라이나야말로 전쟁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지지 않는 방도를 찾아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서방의 성탄절을 지나 러시아의 성탄절을 맞는 이 시기에 두 나라의 최고 지도자들이 제발 자비심을 되찾아 이제 전장에서 흘리는 피와 눈물을 거둘 방도를 함께 생각하고 제시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흔히 전쟁은 남자들의 책임이라고 하지만, 남자들이 피를 흘려도 안 되는 것이고, 더구나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애꿎은 피와 눈믈은 더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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