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중 논설위원, 가정경영연구소장,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교차로에서 정차 중인데, 미국에 사는 아들이 손녀와 손자 사진을 보내왔다. 휴대전화 속의 고 녀석들을 보며 웃다가 고개를 드니 앞차가 벌써 저만큼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앞차가 꾸물거리면 빵빵 경적을 울리기도 했는데 너그럽게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니, 부끄러움이 훅 밀려왔다.

지하철을 타면 교통약자석 자리가 비어 있을 때가 많다. 퇴근 시간엔 무척 피곤할 텐데, 앉았다가 자리를 양보할 법도 하건만 좌석을 비워 두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고맙고 대견한지, 무턱대고 “요즘 것들은” 하고 나무랄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경우가 없는지, 세상이 얼마나 망가지고 오염됐는지 입만 열면 온통 불평불만인 사람도 있지만 돌아보면 훈훈한 이야기, 친절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도 많다.

식당에서 고기는 통상 2인분 이상이 아니면 안 파는데 혼자 갔는데도 특별히 서비스한다며 상을 차려 주던 고깃집, 커피숍에 가면 요즘은 키오스크를 가리키며 대면 주문은 잘 안 받지만 우물쭈물하는 날 보고 친절하게 주문을 받아주던 종업원도 기억에 남는다.

뛰어오는 발소리를 듣고 엘리베이터를 잡아 주는 사람, 양손에 쓰레기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손수 내 박스를 옮겨 주는 이웃도 고맙다. 카페에서 여덟 명이나 되는 일행들과 함께 앉을 자리를 못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옆자리로 옮기며 자기 테이블을 양보해 줬던 사람도 감사하다.

오래전,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비서가 내가 사장실 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것 같아 내 방에서 나갈 때면 노크하고 나갔었다. 그런데 그걸 본 후배가 감동했다며 아직도 그 얘기를 한다. 상사에게 예의를 갖추라고만 할 게 아니라 직원에게 좀 더 친절한 상사, 지나친 의전은 사양하는 상사가 된다면 만족도가 오르고 이직률도 줄지 않을까?

서비스업에 종사하거나 고객을 응대하는 사람에게만 친절을 요구할 게 아니다. 소비자들도 종업원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고객이 왕이라며 고객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던 시대는 지났다. 팔아 주어서, 태워 주어서, 서비스를 제공해 주어서 고맙다고 생각하면 가는 말이 고와진다.

친절이나 배려는 가족 간에 베풀어도 전혀 해가 없는 덕목이다. 가르쳐 드려도 바로 까먹고 계속해서 물어보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께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창하게 효도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젖먹이에게 걸음마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 수십 번, 수백 번을 안고 세우고 손뼉 치고 격려하며 키운 어른들의 공을 생각해 본다면 그 정도의 친절은 당연한 도리이다. 친절이나 배려가 아니라 존중이나 사랑이어도 좋다. 내가 어렸을 때 그 추운 겨울, 몸소 이불 속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데운 다음, 막내아들을 재우셨다는 어머님은 친절이나 배려가 아니라 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배려나 선을 넘는 친절은 해가 될 수 있다. 조그만 친절 하나 베풀어 놓고 뭔가를 기대하거나, 기대에 못 미친다고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거래이다. 친절을 베풀기 전, 나의 친절이 가져올 결과까지 생각하며 행동에 옮길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랴. 지나치게 의존적인 관계를 만들거나 남의 인생에 너무 관여하거나 간섭하는 건 아닌지, 남의 인생을 책임지려고 드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친절과 배려에도 절제가 필요하다. 필요할 때, 상대방이 원할 때 베풀어야 진정한 배려와 친절이 되는 것이다.

소와 사자에 대한 우화가 있다. 서로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한 사자는 소에게 맛있는 고기를 주고, 소는 또 사자를 위하여 싱싱한 풀을 주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않고 아껴서 배우자에게 주었지만 결국 둘은 헤어지고 만다는 우화인데 진정한 배려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적당한 무관심이나 무심(無心)이 배려가 되기도 한다. 입원한 사람에게 어디가 아픈지, 수술은 어떻게 했는지, 내가 궁금한 것을 꼬치꼬치 캐묻기보다 가만히 손잡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큰 힘이 될 수 있다. 발달장애인이 지나갈 때 흘끔흘끔 쳐다보거나 되돌아서 빤히 쳐다보고 수군거리는 것은 삼가야 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이 지나갈 때 우르르 몰려와 구경하고 쑥덕거리고 만지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서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별걸 다 물어보는 병도 고쳐야 한다.

겨울에 먹이가 부족한 새들을 위해 비곗덩어리를 나무에 걸어두고 그릇에 깨끗한 물을 담아 놓거나 나무나 꽃, 내가 즐겨 쓰는 물건에도 상냥하게 얘기를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벌레도 아닌데 무섭다며 보는 즉시 죽일 게 아니라 종이에 떠서 집 밖으로 옮겨 주는 배려는 살생을 금하는 스님에게만 요구되는 태도가 아니다. 친절이나 배려를 환경 보호나 지구 사랑으로 확대해서 실천한다면 인류의 미래가 조금은 밝아질 것이다.

정치를 잘하고 복지 예산을 크게 늘려야만, 많은 것을 희생하며 봉사해야만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작은 친절 하나, 배려 하나로도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말 한마디, 웃음 띤 표정, 밝은 인사, 재촉하지 않고 잠깐 기다려 주는 것만으로도 친절이나 배려를 실천할 수 있다. 내가 베푼 작은 친절 하나, 배려 하나가 또 다른 사람의 친절과 배려를 낳고 그것이 다시 꽃씨처럼 번져 우리 사회에 퍼진다면 좀 더 훈훈하고 살맛 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나날이 심해지는 인간의 이기심과 치솟는 물가, 정치 스트레스, 연일 계속되는 전쟁, 안보와 기후 변화에 대한 불안 등으로 메마르고 거칠어진 이 사회를 치유하는 윤활유가 친절과 배려다. 거창하거나 매년 반복해 온 새해 목표가 아니라 친절이 새해, 내 삶의 목표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는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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