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호 논설위원,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도시설계)

김기호 논설위원
김기호 논설위원

동네에 새로운 카페가 문을 열어서 아내와 함께 산책길에 들렀다. 프랑스 이름의 작은 카페인데 안으로 들어서니 동그랗고 작은 테이블과 나뭇가지를 구부린 등받이 의자(그 유명한 Thonet chair의 유사품일 듯.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의 Michael Thonet가 개발한 의자)가 옹기종기 자리를 하고 있다. 

우리 동네 프랑스풍 카페. 테이블이나 의자, 그리고 컵 등이 약간 작아서 마치 맞춘 듯 우리 몸과 손에 착 달라붙어 친근하게 느껴진다. 사진: 김기호, 2022
우리 동네 프랑스풍 카페. 테이블이나 의자, 그리고 컵 등이 약간 작아서 마치 맞춘 듯 우리 몸과 손에 착 달라붙어 친근하게 느껴진다. 사진: 김기호, 2022

자리에 앉아 커피를 받으니 커피잔이며 물잔이 손 안에 쏙 들어온다. 커피 맛도 좋고 양은 모자란 듯 적절하다. 커다란 머그잔에 잔 받침 없이 타 오는 최고로 유명하다는 프랜차이즈 커피점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새삼 공간이나 가구 그리고 찻잔 등의 스케일이 사람을 이렇게 편안하게도 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체구가 큰 영미(英美)나 독일과는 다른 스케일감으로 디자인한 프랑스식 센스가 느껴진다.

우리가 일본에 여행 가서 느끼는 첫인상 중의 하나는 ‘모든 것이 다 작구나’다. 차도 작고, 일반 음식점도 작고 의자며 탁자도 작다. 거기다가 맥주잔조차 작다.

도쿄도 미타카(三鷹)시의 골목과 작은 차량. 사진: 김기호, 2008
도쿄도 미타카(三鷹)시의 골목과 작은 차량. 사진: 김기호, 2008

처음에는 뜨악하다가도 잔을 기울이다 보면 손에 쏙 들어오는 잔이 편하고 맥주의 양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도 비슷한 크기의 사람들인데 왜 어울리지 않게 큰 의자에 엉거주춤 앉아 무겁게 큰 잔을 들고 어정쩡하게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건축이나 디자인 분야에서는 휴먼 스케일(human scale, 인간적 크기)이라는 용어를 오래전부터 써왔다. 말 그대로 사람의 키, 팔다리의 길이, 손의 크기 등을 고려해 집이나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건물이야 약간 커도 그럭저럭 지내거나 어떤 때는 오히려 시원한 맛이라도 있는데, 우리의 손이나 팔 등 신체를 사용하거나 신체 부분이 닿는 가구나 부엌 용기 등은 휴먼 스케일을 벗어나면 사용이 불편하거나 쓸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인간은 유니버설한 인간이 아니라 지역마다 다른 인간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국과 프랑스, 그리고 일본이 각기 다른 크기의 디자인을 하고 있다. 그러지 못한 경우는 스케일에서 벗어났다(out of scale)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니 혹시 한국 건축이나 디자인이 사용자(한국인)를 벗어난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든다.

몇 년 전 제법 규모 있는 대상지를 위한 국제현상설계 심사과정을 준비할 때 일이다. 나는 준비팀에 부탁하여 심사위원들(외국인 위원이 반 정도 차지)에게 한 20분짜리 강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강연에서 우리 공간문화나 자연의 몇 가지 일반적이거나 또는 전형적인 점들을 설명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크기가 중요합니다(Scale matters)’였다. 내 의도는 심사위원들(특히 외국인 심사위원)에게 서울 사람들의 일상생활 여건과 자연조건에 맞는 시가지 및 건축물을 선정하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라 맨(Modulor Man)을 부조한 위니떼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 아파트(프랑스 마르세이유 소재)의 벽(왼쪽)과 인간의 다양한 활동에 따른 높이 분석(오른쪽). 사진: 김기호, 2009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라 맨(Modulor Man)을 부조한 위니떼다비타시옹(Unite d’habitation) 아파트(프랑스 마르세이유 소재)의 벽(왼쪽)과 인간의 다양한 활동에 따른 높이 분석(오른쪽). 사진: 김기호, 2009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는 건축설계를 위하여 인체의 치수를 분석하여 독특한 치수체계(Le Modulor, 서양인 키 183cm 기준)를 제안하고 그의 건축에 적용하였다. 

위니떼다비타시옹 (Unite d’habitation) 아파트(1952), 마르세이유. 사진: 김기호, 2009
위니떼다비타시옹 (Unite d’habitation) 아파트(1952), 마르세이유. 사진: 김기호, 2009

방의 크기나 높이, 창의 크기, 발코니의 폭이나 높이나 가구까지도 모듈(단위 치수)을 기반으로 이것들의 다양한 배수(황금비례 등)를 적용하여 전체적으로 인간적 스케일과 통합적 비례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그는 이런 생각을 도시를 계획하는 데까지 확장하려 하였다.

일상에 사용하는 말로서 “스케일이 크다”는 “배포나 그릇이 커서 큰일을 도모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뜻이다.

하동관(곰탕집)에서 1960년대 사용했던 의자. 자료: 서울생활사박물관, 사진: 김기호, 2023
하동관(곰탕집)에서 1960년대 사용했던 의자. 자료: 서울생활사박물관, 사진: 김기호, 2023

그러나 환경의 설계 또는 가구 등 생활용품의 디자인에서는 스케일이 크면 결국 불편만 만들어 낼 뿐이다.

얼마 전 박물관에서 본 1960년대 하동관에서 쓰던 의자가 단순히 없던 시절의 궁핍한 디자인이 아니라 군더더기 없는 세련된 휴먼 스케일 디자인으로 보인다면 좀 과장된 표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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