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 원예디자인과 교수, 신구대 식물원 원장

전정일 교수
전정일 교수

식물원장 업무를 다시 시작한 뒤에 주변 여러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개선 사항, 발전 방안 등에 대한 충고와 조언을 듣게 된다.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주로 연배나 지위가 높은 분들인 경우가 많다. 이와 함께 업무 환경이나 업무량이 과다하다고 호소하는 직원들의 불만도 함께 들어줘야 하는 낀 위치에 있는 상황이다.

어쨌든 이렇게 여러 사람이 다양한 얘기를 한다는 것은 식물원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이성적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맞겠다. 그렇지만, 감성적으로는 피로감이 누적되어 종종 그런 말에 집중하기 어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자기 방어기제가 작동하는지 듣고 나서 금세 잊어버리기도 한다. 노화가 촉진되고 있음일까도 생각하지만, 아직 노화를 언급하기엔 뭔가 아쉬움이 있다. 연말로 접어들면서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 정신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부모의 말을 안 듣거나, 학생이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또는, 칭얼대는 아이를 애써 외면하는 부모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여러 가지 이유와 비슷한 상황이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듣기 싫은 말에 귀가 닫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이가 50대 후반으로 접어들어 가지만, 아직 이순(耳順)에 이를 정도까지는 성숙하지 못해서 남의 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사실 스스로는 늘 귀를 열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어떤 식물만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나를 더 노력하게 만들기도 했다.

20년이 다 돼가는 일이다. 어떤 후배가 있었는데,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상황상 매주 한 번 그를 만나야 하는 때였다. 그에게 신세 진 일은 없지만, 선배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매주 만날 때마다 간단하게나마 식사도 대접하고 내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 만남 즈음에 술을 한잔하게 되었는데, 몇 잔 술이 들어가자 그 후배는 온통 내가 어떠어떠한 일들을 잘못하고 있다고 원망하며 서운하다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거의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그 원망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때 그렇게까지 그 후배에게 잘못했었는지 사실 아직도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몇 번 더 만날 일이 있었는데,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 몇 번의 만남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고, 마음이 닫혀버린 것을 느끼곤 했다. 특히, 귀가 닫혀버렸다. 

한여름에 진한 녹색의 잎을 배경으로 보라색 꽃을 멋지게 달고 있는 맥문동(Liriope platyphylla F. T. Wang & T. Tang).
한여름에 진한 녹색의 잎을 배경으로 보라색 꽃을 멋지게 달고 있는 맥문동(Liriope platyphylla F. T. Wang & T. Tang).

그즈음에 그 후배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던 식물인 ‘맥문동’의 장점에 대해 만날 때마다 긴 시간을 할애해서 역설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 술자리 이후로는 그 식물에 관한 얘기가 더 이상 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마음에서 멀어져 버렸다.

맥문동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참 좋은 식물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까지는 그 후로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이성적으로야 알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이다. 

마음을 열어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맥문동’. 중부지방에서 겨울에도 푸르름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초본식물이다.
마음을 열어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맥문동’. 중부지방에서 겨울에도 푸르름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초본식물이다.

알고 보면 맥문동은 좋은 점이 많은 식물이다. 맥문동(麥門冬)은 뿌리가 보리 뿌리의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뿌리는 수염뿌리로 가늘고 긴데 어떤 것은 뿌리 끝이 굵어져서 땅콩 모양의 덩이뿌리가 된다. 한방에서 이 뿌리를 약재로 사용하는데, 강장·거담·진해·강심 등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맥문동이 약용으로는 잘 알려져 있던 식물이지만, 그 후배가 추천할 때까지만 해도 정원 소재로는 널리 활용되지 않았었다. 요즘은 그늘진 곳에서도 잘 자라는 맥문동을 아파트나 빌딩의 그늘진 정원에 심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짙은 녹색을 띤 길이 30∼50cm, 너비 8∼12mm 정도의 잎이 빼곡히 모여 자라는 모습이 잔디밭과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더구나 날씨가 뜨거워지는 7∼8월에 녹색 잎을 배경으로 자줏빛 꽃이 피면 예쁜 구슬을 녹색 보자기에 뿌려놓은 듯 환상적인 모습이 펼쳐진다. 더군다나 이 녹색 잎은 겨울에 눈이 내려도 바래지 않고 흰 눈과 대비를 이루며 멋진 모습을 연출한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만일 그때 그 후배의 추천을 받아들여 증식에 힘썼다면 경제적 이익도 꽤 크게 얻지 않았을까 하는 얕은 생각도 해본다. 그때는 맘에 들지 않는 후배가 맥문동을 추천하니, 그 식물이 좋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아도 감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의 말에 귀가 닫혔다. 마음이 닫히니 귀도 닫힌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을 보지 말고 그가 하는 말의 내용에 집중해야 했었다. 맥문동을 통해서 좋은 말은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어떤 말이든 가슴을 열고 마음으로 들어야 좋은 말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오늘도 식물원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고언(苦言)에 마음을 열고 귀 기울여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상처받지 않는 훈련도 좀 더 해야겠지만 말이다. 마음 훈련은 쉽지 않고 오래 걸릴 것인데, 맥문동 약리 작용 중에 ‘강심(强心)’ 작용이 있다고 하니 올겨울에는 따뜻하게 ‘맥문동차’라도 자주 달여 마셔야 할까 보다. <다음 글은 12월 14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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