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허찬국 논설위원
허찬국 논설위원

최근 차로 제주도를 다녀왔다. 옮겨야 되는 짐이 있고, 그곳에서 차를 쓰는 게 편해서 운전대를 잡은 것인데,  집이 있는 용인에서 남해안 카페리가 다니는 항구를 거쳐야 하니 꽤 먼 길이다. 지리산 탓인지 여수 가는 고속도로가 남원쯤서부터 내리막이 시작돼 한 100km 이어지는 듯했고, 쉼 없이 터널이 나오는 게 기술이 좋아져 옛날처럼 두부 베듯 산자락을 깎지 않았으니 좋은 일이라 감탄했다.

이렇게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주마간산했는데 내가 운전을 자주 하는 일이 비교적 새롭다. 시간적 여유가 많아졌다는 개인적 이유와 더불어, 전적으로 스마트폰 내비게이션(navigation) 기술의 발달과 노면 색깔 안내선 덕이다. 나에게 자동차의 쓸모가 크게 향상된 것인데, 달리 말해 자동차의 생산성이 높아진 셈이다.

강산이 두 번쯤 변할 동안 해외에서 살다 돌아오니 처음엔 도시 풍경, 도로망과 넘치는 교통량이 너무 낯설어 운전이 망설여졌다. 미국에서도 출퇴근을 전철에 의존했기 때문에 복잡한 도심을 운전할 일이 거의 없었다. 수십 년 경력자가 운전을 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인 듯해 시도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다. 경미한 접촉 사고로 남의 차 범퍼를 받아 수리비를 여러 번 물어주었고, 멱살도 잡혀 봤는데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길을 모르는 게 운전을 망설이게 하는 더 중요한 이유였다. 운전하다 길을 못 찾아 회의에 지각하니 눈초리가 따가웠다. 결국 지하철과 택시에 의존하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은 초행길도 스마트폰의 내비 기능에 의존해 순행한다. 20년 전에도 내비가 있었으나 전혀 사용자 친화적이지 못할 만큼 불편했다. 더욱이 한 번 입력해 놓은 지리·도로 정보는 오프라인으로 갱신해야 해서 내비 화면에 공터인 곳으로 차가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정확하지도, 정밀하지도 않았다. 물론 개발 초기에도 내비가 크게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었을지 몰라도, 길이 낯선 주말 운전자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후 기술이 놀라울 만큼 발전했다, 복잡한 도심에서 목적지에 가려면 어느 차선을 타야 하는지, 길을 잘못 들었을 때 새로운 경로를 알려주는 요즘 내비는 정말 쓸모 있는 길잡이다. 감각이 뛰어난 얼리 어답터는 어떠한 신기술이라도 잘 쓸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면 해당 기술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신기술은 쓰기 쉬워져야 하고 학습기간이 필요해 시간이 걸린다.

카페리에 실린 생산성 높은 필자의 차.
카페리에 실린 생산성 높은 필자의 차.

요즘 운전하며 분홍색과 초록색의 도로 안내선의 진가를 새삼 절감하고 있다. 자동차 전용도로, 고속도로에서 길을 잘못 들면 크게 낭패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강릉 방면 영동고속도로는 원주 좀 전에서 중앙고속도로와 교차한다. 대구 방면 중앙고속도로 출구가 먼저고 곧 이어 춘천 방면 출구가 나온다. 전자는 분홍색, 후자는 초록색이다.

 자동차 운전에 큰 도움이 되는 노면색깔 안내선. 구글 캡처
 자동차 운전에 큰 도움이 되는 노면색깔 안내선. 구글 캡처

큰 표지판을 감안하면 안내선이 불필요한 중복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교통 흐름이 복잡하여 주위가 산만해진 운전자가 표지판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다. 정보가 간단명료할수록 실수할 개연성을 줄여준다. 색채로 구분된 안내선은 자동차 내비가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을 더욱 간결하고 알기 쉽게 만들어 준다.

노면 색깔 안내선과 자동차 내비는 서로의 효용을 높이는 상승작용의 예이다. 안내선은 내비의 길잡이 역할을 증진한다. 이런 개선은 길 찾기가 걱정이던 나와 같은 운전자들에게 자동차를 더 쉽고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스마트폰의 내비 기능은 내비가 내장되지 않은 차를 운전하는 필자에게도 기술발전의 혜택을 제공해준다. 즉, 새로운 기술은 기존 장비의 생산성까지 향상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약 20년 전쯤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자동차 내비의 기술이 개선되면서 더 많은 자동차의 효율성을 늘려준 것이다.

이런 식으로 기술개발의 긍정적인 효과가 자동차와 같은 자본재의 생산성을 높이면 경제 전반에 걸쳐 효과가 가시화된다. 새로운 기술이 사용자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혁신적 기술 개발의 효과가 시차를 두고 나타나는 일은 흔하다. 19세기 후반에 완공된 미국의 철도망, 에디슨이 발명한 전기와 같은 혁신의 경제적 효과도 수십 년 후에야 가시화되었다고 한다. 철도망의 경우 일반 가계들 사이에 우편을 통한 표준화된 공산품 구매(오늘날의 택배)가 확산되며, 전기의 경우 일반 가구에 전구 보급이 확산되면서 경제적 효과가 가시화됐다는 것이다.

최근 인공지능(AI)이 뜨거운 논란거리다. 하지만 AI를 포함한 디지털 이코노미분야의 혁신과 엄청난 투자의 긍정적 혜택은 아직까지 거대 디지털 기업들에 집중되어 있어 보이고 경제 전체의 생산성(근로자의 단위 생산량) 증가 효과는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 기술혁신의 긍정적 효과가 확산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감안하면 납득이 간다.

자동차와 내비가 주는 시사점은 적절한 정부의 역할이다. 기술 혁신이 경제 성장 촉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초조해하며 묘수 찾기에 전전긍긍하기보다 내비가 운전자들의 편의와 안전을 증진할 수 있도록 돕는 노면 색깔 안내선과 같은 일을 찾는 것이다. 그 자체가 시설을 이용하는 국민들에게 유용할 뿐 아니라, 관련 분야 기술혁신의 촉매로 작용할 사업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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