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전 숙명여대 객원교수

손우현 논설위원
손우현 논설위원

한중일 외교장관은 3국 정상회의 준비를 가속화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가 연내 개최를 희망했던 한중일 정상회의는 이르면 내년 초에 개최될 것으로 보인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26일 제10차 한일중 외교장관 회의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3국 협력체제의 최정점인 정상회의를 상호 편리한, 가장 이른 시기에 개최하기로 한 합의를 재확인하고 정상회의에 필요한 준비를 가속화하기로 했다"며 "머지않은 시점에 가시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3국 외교장관의 만남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2019년 8월 제9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4년 3개월여 만에 성사된 것이다. 의장국 자격으로 박 장관이 주재하고 가미카와 요코(上川陽子) 일본 외무상과 왕이(王毅)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이 참석했다.

그러나 100분가량 진행된 회의 이후 3국 외교장관이 함께 결과를 발표하는 공동기자회견은 왕 부장의 귀국 일정이 앞당겨지면서 열리지 않았다.

박진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상,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이 26일 부산에서 한일중 3국 외교장관회담 전 산책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제공]
박진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상,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겸 외교부장이 26일 부산에서 한일중 3국 외교장관회담 전 산책하고 있다. [사진= 외교부 제공]

한편 중국의 외교 스타일이 변하고 있다. 과격한 언사를 사용해 강경하게 국익을 관철하던 ‘전랑(戰狼·늑대 전사)외교’가 후퇴하고 유화적인 실리외교가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1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이 회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가장 시급한 군사대화 채널 복원에 합의했다. .또 기후위기·인공지능(AI)·마약 문제 대응에 협력하기로 했다. 두 정상은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의 첫 대면 정상회담 후 1년 만에 다시 만나 신냉전으로 가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인했다.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미중 간에는 군사대화 채널이 단절됐고, 대만이나 남중국해 등에서 양국 군의 우발적 충돌이 우려되는 등 미중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었다.

미중 관계 안정화에 대한 의지를 보인 시 주석은 대만 문제와 미국의 대중국 수출 통제 등에 대해서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이번 회담은 지난해 11월 발리 정상회담보다 훨씬 부드럽고 친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는 평가다. 시 주석은 특히 미국 기업인들과의 모임에서는 “중국은 미국의 동반자이자 친구가 될 준비가 돼 있다”고 하면서 러브콜을 보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985년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시 주석이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보며 활짝 웃는 모습을 공개했으며 중국중앙TV(CCTV)는 시 주석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자신의 전용차인 중국산 ‘훙치(紅旗) N701′을 자랑하고, 헤어질 때 두 손으로 정답게 악수하는 영상을 내보냈다.

뉴욕타임스(NYT)는 시 주석이 이번 방미 기간 중 그동안 추진해 온 ‘전랑(wolf warrior) 외교’와 거리를 두었다며 이는 미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몇 가지 현안 때문이라고 논평했다. NYT의 외교 국방 전문기자 데이비드 생어(David E. Sanger)는 이번 회담에서 시 주석의 우선순위는 미국의 대 중국 투자 부활과 반도체 및 AI 관련 기술의 수출 규제 철회를 이끌어내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군사대화 채널 복원과 미국의 심각한 사회 문제인 ‘좀비마약’ 진통제 펜타닐의 유입 차단을 위해 협력하기로 합의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앤터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양국 국방장관 간의 연락망뿐 아니라 지역 사령부 간의 군사 대화 채널의 부활은 오판과 실수를 방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NYT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문제는 중국 측의 이런 유화적인 태도가 본질적인 변화냐 또는 전술적인 변화냐 하는 것이다. 미국 관리들은 미중정상회담 결과에 만족하면서도 중국의 태도 변화가 과거 행동을 볼 때 오래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시 주석은 이번 회담을 통해 중국이 현재 겪고 있는 40년 만의 경제적 위기, 즉 기업 도산 사태, 부동산 가치 폭락과 소비자 신뢰 상실 등을 극복할 방안을 찾고 있으며 미국과의 군사, 기술, 경제 분야에서의 경쟁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두 개의 전쟁 와중에 미국 대선을 1년 남긴 바이든 대통령은 미중관계의 안정적 관리가 더욱 필요한 시기이다. 시 주석은 “지구는 두 나라가 모두 성공할 만큼 충분히 크다”며 중국의 패권 야심을 내비쳤다. 주중대사를 지낸 이규형 전 외교통상부 2차관은 “중국 관료들은 전략적 사고가 체질화해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편 프랑스의 권위지 르 몽드는 ‘바이든-시진핑 회담, 최소한의 진전’ 제하 사설을 게재하고 두 지도자 간의 톤(tone, 불어 ton)은 바뀌었지만 지정학적, 경제적, 이념적 대립은 여전하다며 이번 회담은 ‘최소한의 진전’에 그쳤다고 논평했다. 또한 중국이 미국 동물원에서 판다를 철수하고 미국은 트럼프 때 폐지된 중국 유학생을 위한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부활시키지 않는 등 양국 간의 우호의 상징이 약화된 점과, 이번 회담 후 기자 질문에 시진핑 주석을 여전히 독재자라고 칭한 바이든의 발언 등을 고려할 때, 미중 관계의 복원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논평했다.

제한적이긴 하지만 중국의 유화적인 자세는 한국에도 적용되고 있다. 지난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참석한 한덕수 국무총리는 시진핑 주석과 회담을 했다. 중국 외교부 발표에 의하면 시 주석은 양국 외교 관계에 대해 “이사 갈 수 없는 가까운 이웃이자 떼려야 뗄수 없는 협력 동반자”라며 “중국은 한국과 함께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시대에 발맞춰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과거 시 주석이 한국 대통령 특사를 상석에서 고압적으로 맞이하던 것에 비하면 격을 낮춰 한 총리와의 회담에 응한 시 주석의 유연성은 눈여겨볼 만하다.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 14일 르 몽드지와의 회견에서 “미중 관계 완화는 한국에 도움이 된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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