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논설위원,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함인희 논설위원
함인희 논설위원

1990년대 중반,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14%가 넘는)를 지나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차지하는)를 향해 가고 있던 북유럽 국가로부터 들려온 소식이다. 당시 북유럽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가족양식(?)이 LTBT커플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LTBT란 Living Together But aparT의 머리글자를 조합한 것으로 굳이 번역하자면 ‘별거동침’(別居同寢) 정도가 될 것 같다.

북유럽의 경우 65세에 접어들게 되면 이혼이나 사별로 인한 돌싱 비율이 35~40%에 이르는 상황이고 보니, 인생 후반전에 선택하는 커플 양식이 바로 LTBT라는 것이었다. LTBT커플은 싱글의 장점과 결혼의 장점을 결합한 양식일 수도 있겠고, 싱글의 약점을 극복하되 결혼의 단점은 반복하지 않는 형태일 수도 있겠다.

흥미로운 사실은 첫 결혼 상대자를 고를 때의 기준과 두 번째 이후 파트너를 고를 때의 기준이 확연히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첫 결혼 상대를 고를 때는 대체로 남성의 경제적 능력과 여성의 외모를 중시했다면, 두 번째 이후부터는 남녀 모두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 ‘나의 존재를 오롯이 인정해주는 사람’이 1순위로 떠올랐다고 한다.

덕분에 첫 결혼은 교육 정도, 가족 배경, 인종, 종교 등을 기준으로 동질혼(同質婚)이 주를 이루었던 반면, 두 번째 결혼부터는 (전직) 전문직 여성과 블루칼라 남성 혹은 고학력 여성과 저학력 남성, 유색인종 남성과 백인 여성 등 다양한 유형의 이질혼(異質婚)이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LTBT커플을 상대로 “만일 지금의 파트너가 간병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오면 기꺼이 돌봐줄 것인지?” 물었다. 이 질문에 남성의 80%, 여성의 20%가 ‘그리하겠노라’ 답했다고 한다. 남성의 순애보가 눈물겹기는 한데, 아마도 젊은 시절 직접 돌봄을 수행했던 경험이 없었기에, 돌봄에 대한 막연한 로망을 피력했을 것이라는 연구진의 해석이 이어졌다.

노년의 파트너십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는 상황에서 최근 마주쳤던 대학 선배의 고백이 생각난다. 선배 남편은 대기업 사장까지 지낸 입지전적 스토리의 주인공인데, 자신은 남편이 퇴직한 후에야 비로소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새벽 4시에 출근하고 다음 날 새벽 2시에 퇴근하던 남편,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데. 가족을 위한답시고 일에 미쳐 살았던 남편, 한편으로는 밉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짠해서, 남편 퇴직 후 같은 남자와 다시 사랑을 시작했노라는 이야기였다.

‘라이프 스타일 이주(life style migration)’라는 개념이 있다. 라이프 스타일 이주란, 마치 국경을 넘어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이주(移住)처럼, 라이프 스타일 전환을 통해 이주민처럼 새로운 삶의 경험에 도전해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례로 인생 전반기에 돈 버는 일 중심의 삶을 살아왔더라면, 후반기엔 자원 활동이나 취미생활 등 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놓여나는 시간을 보낸다든가, 지금까지는 나 아닌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이타적 삶에 가치를 두었다면 이제는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자신의 솔직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아보는 것처럼 말이다.

인생 이모작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에는 우리네 생애주기의 농축적이고도 압축적인 변화가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예전 한국인의 전형적 생애주기는 남편과 사별한 이후 아내 혼자 8~10년을 보내야 했고, 자녀를 5~6명 낳았던 시절인 만큼 남편 사후 장남이 동생들을 건사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지금은 2~3명의 자녀를 모두 독립시킨 후 부부만 남게 되는 ‘빈둥지 가족’ 시기가 대폭 연장되었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로 가면 부부가 함께 노후를 보내는 기간은 더욱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사랑에도 이모작 시대를 열어봄이 어떨는지. 지금까지 자녀가 1순위였던 삶을 뒤로하고 진정한 부부중심 가족이 되어 부부만의 여유롭고 풍성한 노후를 지나가 볼 일이다.

부부 나이를 합산해서 100살이 될 즈음, 인생 이모작 시대를 준비하라! 결코 빠르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의 조언이다.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레 포기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작이 반’이니 언제라도 이모작 준비에 나선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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