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 논설위원, 전 한국일보 심의실장

정숭호 논설위원
정숭호 논설위원

오랜만에 모이면 안 빠지는 이야기가 건강과 건망증이다. 얼마 전 다섯이 모인 점심 자리에서는 건강보다는 건망증 이야기가 훨씬 더 길었다. 다섯 중 제일 나이 적은 친구가 며칠 새 지갑 두 번, 전화기 한 번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수서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곤 수색역으로 갔다거나, 남도식당으로 가야 할 걸 거기 가까운 고향식당에서 혼자 달랑 기다리다 부랴부랴 뛰쳐나와 남도식당으로 달려왔다는 따위의 일화가 수북한 ‘천재 끼’ 확인된 사나이가 이번엔 뭔 우스운 일 저질렀나, 모두 귀를 기울였다.

지갑은 택시를 탔다가 내려서 찾으니 사라졌고, 전화기는 지하철 의자에 두고 내렸다고 했다. 그 지갑은 바로 며칠 전에 다른 곳에서 잃었다가 찾은 거라면서. “그런데요, 세 번 모두 다시 찾았어요. 지갑은 주운 사람이 파출소에 맡겨서 찾았고요, 전화기는 혹시 싶어 지하철 유실물센터를 검색했더니 내 거가 있더라고요.” 다음은 그 뒤에 이어진 이야기.

“요즘은 전화기 주우면 유심칩만 빼서 돌려주고 공기계는 팔아먹는다는데 그대로 찾았다니 다행이네요.”

“지갑에서 빠진 건 없던가요?” “전부 그대로 있었어요. 현금도요.”

“우와, 양심적인 택시기사네!” “맞아요. 그런데 우리가 진화한 게 맞아요. 몇 년 전에도 지갑 잃었다가 찾았는데 속에 둔 70만 원은 없어지고 지갑만 돌아왔어요. 그때랑은 달라요. 확실히 대한민국이 좋아졌어요.” “나는 신용카드를 ATM에 꽂아두고 나왔는데 저녁에 들어가면서 혹시나 싶어 들어가 봤더니 누가 그 위에 곱게 놓아뒀더라고요.”

이야기는 이제 건망증에서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대한민국이 남의 물건 탐 안 내는 양심적인 나라가 됐으며, 다른 분야에서도 이제 ‘선진국’이 됐다는 뿌듯함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털어놓았다.

“외국 사람이 물건을 놓고 간 걸 뒤늦게 알고는 부근 파출소에 신고하러 갔는데, 주운 사람이 벌써 그 파출소에 맡겨 놓았다는 거 아니에요? 한국이 이렇게 좋은 나라, 사람들이 착한 나라인 걸 확실히 알게 됐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잖아요?” “맞아요, K-팝이 세계 곳곳에서 들리고 한식 맛보려는 사람들이 뉴욕 런던 파리에 줄을 선다잖아요. 유튜브로 우리말 배우는 외국 젊은이들도 엄청 많다는데요?” “잘살게 되면 의식도 높아진다더니 우리도 그런 수준이 됐나 봐요.” “우리가 일곱 번째 3050클럽 가입국이라며요?” “그게 뭔데요?”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이상 나라가 3050클럽 가입국이라고 한답니다.” “하긴, 우리가 IT강국 된 지는 벌써 오래지요. 그뿐인가요. 문화나 스포츠에서도 우리나라 만만한 나라 아닌 지도 오래됐어요. 첨단 무기도 수출하고 있지요.” “그런 게 모두 언론이 K-선진국이라고 쓰는 이유겠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 ‘삐딱이’가 하나 있었다. 그는 “K-선진국과 선진국은 다르지요. K-선진국과 진짜 선진국은 차이가 한참 커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라며 들떠 있다가 살짝 뜨아해하는 표정으로 변한 좌중을 돌아보곤 말을 이었다.

“그렇게 수준 높은 사람들이 왜 자기 먹던 커피 컵은 아무데나 두나요? 지하철 입구, 버스 정류장, 주차장, 공원 벤치, 아파트 산책로 계단 등등 어떤 공공장소에 언제든 가보세요. 일회용 커피 컵이나 주스 통 몇 개는 반드시 볼 겁니다. 그냥 바닥에 마구 버리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버리기는 하지만 이렇게 벤치 위에 반듯하게 놓을 정도는 된답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대신 치우는 분 치우기 쉽도록 말입니다’라고 생각하며 버리는 거 같아요. 그렇게 버리면 양심에 가책을 덜 느껴도 된다고 보나 봐요. 분리수거하는 날이 아닌데도 집에 두기 거추장스러운 커다란 상자 같은 걸 내놓는 사람도 많아요. 이 사람도 그런 물건 쓰레기장 한쪽에 가지런히 쌓아 놓으면서 ‘나, 버리기는 하지만 청소하는 사람들 덜 힘들게 한 건 맞잖아?’라며 자기 양심 속이는 표정이 눈에 떠오르지요.”

도서관 앞 벤치에 살그머니 올려놓은 커피 컵, 담뱃갑과 아파트 산책로 담벼락에 올려놓은 커피 컵. 
도서관 앞 벤치에 살그머니 올려놓은 커피 컵, 담뱃갑과 아파트 산책로 담벼락에 올려놓은 커피 컵. 

“쓰레기만 안 버리면 되나요?” “아니요, 제발 미안하다는 말 좀 하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손이나 몸뚱이로 앞 사람 밀치며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교차로에서 먼저 가려다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히고도 그냥 가는 사람과 다른 사람 앞길 막는 사람, 닫힌 엘리베이터 문 다시 열고 타면서 미리 탄 사람 멀뚱히 쳐다보는 사람. 이런 사람들 보면 화가 나요. 미안해할 줄 모르니 아무데서나 전화 걸어 큰 소리로 떠들고, 식당이나 상점에서 아이들 멋대로 뛰게 내버려두고, 화장실서는, 간혹 줄을 서기도 합디다만, 먼저 온 사람 무시하고 변기로 쳐들어가는 사람이 안 없어지는 거 아닌가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는 배운 예절을 금세 까먹는 것도 미안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매일 보면서 배우기 때문일 걸요? 백 명 중 절반 정도만 ‘미안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남을 덜 불편하도록 하는 나라. 그때 대한민국이 선진국일 겁니다. 지금은 백 중 두셋이나 되려나.”

“저명한 교수 한 분이 신문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의 지력(知力)이 낮은 게 문제’라면서 정치가 후진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그거인 것 같은데요? 지력이 떨어지니까 미안해할 줄 모르는 거 아닌가요? 미안해할 줄 모르니까 뻔뻔스러워지고, 내로남불 저지르고. 미안해한다는 건, 남을 배려한다는 거 아닌가요? 배려는커녕 남의 권리 침해하고도 내가 뭔 잘못 저질렀냐고 소리 지르는 나라인데.”

그 삐딱이는 그 후에도 몇 마디 덧붙였는데, 요지는 “K-선진국은 절대로 선진국이 아니다. 국뽕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앞길 가로막고, 우리 다리 붙잡는 ‘국뽕!!!’ 

삐딱이는 ‘개인형 모빌리티’를 아무데나 버려 놓는 데도 분개한다. 길 복판에 저런 것이 죽은 초식동물처럼 자빠져 있으면, 특히 어두운 밤에는 지나가다 넘어지기 십상이다.
삐딱이는 ‘개인형 모빌리티’를 아무데나 버려 놓는 데도 분개한다. 길 복판에 저런 것이 죽은 초식동물처럼 자빠져 있으면, 특히 어두운 밤에는 지나가다 넘어지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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