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 논설위원, 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허찬국 논설위원
허찬국 논설위원

미국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에 내몰린 우크라이나와, 하마스의 테러 만행에 전쟁으로 맞서고 있는 이스라엘을 아낌없이 지원하고 있다. 이런 지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별 이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식자층 대다수가 자유주의, 민주 진영을 선도하는 주축 국가로 가치동맹 우방을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한 미국의 역할이라고 판단하며 바이든 대통령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추종하는 공화당 정치인들이 미국 정부의 우크라이나-이스라엘(이하 우·이) 동시 지원 정책에 딴지를 걸고 있어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전후 사정을 살핀다.

국가의 위상을 결정하는 요소의 하나는 경제력, 국방력 등과 같이 쉽게 구체화할 수 있는 부분(하드파워)이다. 국내총생산(GDP) 규모 및 생활수준, 무기체계의 질과 양이 대표적인 예다. 이에 더해 국가의 중대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지배구조, 정부에 대한 신뢰처럼 쉽게 구체화할 수 없는 부분(소프트파워)도 있다. 교육제도의 우수성, 문화적 영향력 등이 후자에 포함된다. 중미국가 베네수엘라는 엄청난 석유 매장량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엉망이고 엄한 좌파 정책으로 경제가 파탄 나 국민들이 줄지어 떠나고 있다. 소프트파워가 꽝이면 하드파워가 강해도 국가의 위상이나 국민 복지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군사력, 부존자원에서 강대국인 러시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미국은 세계 최대 경제·군사 강국이다. 인종 갈등, 총기 및 마약 문제 등 복잡한 사정으로 내홍이 끊임없으나 전체적으로 소프트파워가 건실한 상태이다. 잦은 선거에도 불구하고 순조로운 정권교체, 삼권분립 등 연방정부 차원의 지배구조가 유지되며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근래 중국의 부상으로 상대적 위상이 과거와 같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인데, 미국의 위상 약화를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쟁의 중요한 원인(遠因)으로 지목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미국 소프트파워 약화에는 내부 악재의 부식력(腐蝕力)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바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MAGA)’ 구호를 추종하는 자들의 2020년 선거결과 부정이다. 정당의 후보끼리 경쟁하여 선거를 치르고, 그 결과에 따라 승자가 정해진 기간 정권을 잡아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체(政體)의 정권 이양 방식이다.

그런데 선거에 진 현직 대통령이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겠다고 나서면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 전통이 짧은 개도국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현대적 민주주의의 효시라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제 이런 조작된 증거를 바탕으로 선거결과를 뒤집으려던 시도에 대해 연방 법원과 조지아주 법원에서 공식적 사법절차가 시작되어 관련자들이 엄중하게 다루어질 전망이다. 트럼프가 선동한 폭도들의 2021년 의회 난입에 대한 단죄는 거의 마무리 단계여서 음모의 배후자들이 재판을 받는 수순이다.

트럼프가 2024년 대선 공화당 후보군(群)을 압도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MAGA는 후퇴하기는커녕 오히려 공화당을 휘어잡았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한 형국이다. 작년 말 치른 선거에서 작은 의석수 차(221:212)로 공화당이 하원의 다수당이 되었는데, 하원은 이로 인해 전례 없는 고초를 겪고 있다. 올 초 하원의장 선출과정에서 난맥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다수당이어서 당내에서 선출된 후보를 지지하면 끝나는 일이었는데, 소수의 MAGA 의원들이 자당의 케빈 매카시 의원이 너무 ‘온화’하다며 지지를 거부했다. 각종 양보를 끌어낸 후에야 15번째 하원 본회의 의장 선출 표결이 끝났다. 이게 나쁜 전조였던 것이 시쳇말로 ‘생쇼’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올여름 미국 부채한도를 둘러싼 정쟁이 바이든 대통령과 매카시 의장의 협상으로 타결되자 MAGA 의원들은 매카시가 배신한 것이라며 10월 초 그를 의장직에서 축출했고, 그 후 당내에서 선출된 여러 후보가 본회의에서 고배를 마시거나 사퇴하며 의장 공석 상태가 이어졌다. 의장이 의원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어서 심지어 트럼프를 의장 후보로 추대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10월 25일 천신만고 끝에 마이크 존슨 의원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는데 그는 지난 대선 직후 결과를 뒤집기 위한 각종 소송 제기에 앞장섰던, 지명도 낮은 MAGA로, 트럼프 지지세가 강한 루이지애나주 지역구 출신이다.

존슨 의장은 취임 후 이스라엘 단독 지원안을 통과시켰다. 그것도 행정부가 국세청(IRS) 보강을 위해 이미 의회를 통과한 예산을 삭감한다는 조건하에서다. 누가 보아도 억지인 것이 상원의 공화당 의원들조차 단독 지원을 반대하며 우·이 동시 지원을 지지하고 있고, 바이든 대통령은 단독지원 방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것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양원(兩院) 사이에 이견을 조절하기 위해 통과된 안을 바탕으로 조절하는 통상적 절차를 무시하고 상원은 우·이 동시 지원안을 독자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한다는 MAGA 하원의 우크라이나 지원 거부 정책의 궁극적 수혜자는 침략의 주범 푸틴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MAGA 구호가 MRGA, 즉 ‘러시아를 다시 위대하게(Make Russia Great Again)’와 동의어가 아닌가 싶다. 푸틴을 존경한다는 트럼프가 싫어하지 않을 일이다.

IRS 관련 예산은 기업이나 개인의 세 부담을 정하는 세율(稅率)과 무관한 것이다. 이미 정해진 세금을 제대로 걷기 위한 IRS의 인력이나 장비가 터무니없이 부족해 관련 업무가 지연되고 정상적 세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책정된 것이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전문기관들이 그 필요를 인정하는 것으로 다음 기회에 살피고자 한다.

유럽과 중동의 전쟁은 자유·민주 진영에 대한 위협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엄중한 현실임을 생생히 보여준다. 자유진영의 가치와 영역을 공고히 하는 게 미국의 장기적 이익에 부합한다. 그럼에도 MAGA는 이런 세계관을 가진 사람을 ‘세계주의자(Globalist)’라고 하는데, 점잖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나라를 팔아먹는 X’과 같은 욕으로 쓰인다. MAGA 행태는 우방에게는 우려를, 적에게는 위안을 주는 소프트파워 갉아먹기 그 자체이다.

진행 중인 재판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경우 한국에 핵우산 제공 대가 및 주한미군 비용이라고 거액을 청구할 개연성이 크다. 한국은 독자적 핵 보유를 통해 부담액을 줄이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지 모른다. 반갑지 않은 시나리오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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