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이성낙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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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지리아 의대 교수의 무거운 눈물

1980년대 초 어느 날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출신 의대 교수가 필자를 찾아왔습니다. 영국에서 유학한 바 있다는 그는 서울에서 개최된 학회에 왔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필자를 찾아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피부학 관련 학술지에서 필자의 논문을 읽었다면서 ‘서울에 가면 필자를 찾아보겠다’라는 생각으로 필자의 주소를 메모해 두었다고 합니다.

반갑고 고맙기도 하였지만, 일견 그가 필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하고, 연세대학교 내 'Guest-House'에 연락하여 며칠 지낼 수 있도록 주선하였습니다. 필자는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지만, 숙소를 마련해주고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식사 후 이런저런 대화 끝에 한국전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필자는 한국전쟁을 서울에서 직접 겪은 이야기며 1950년에서 1953년 사이 서울이 점령되었다가 탈환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서울 전역이 허허벌판이 되었고 1970년대에 이르러 서울 거리가 어느 정도 정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그에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전쟁의 상흔을 품고 있는 서울 거리 1953년. 자료: Google에서 캡처
전쟁의 상흔을 품고 있는 서울 거리 1953년. 자료: Google에서 캡처

그는 한국은 전후의 폐허를 딛고 이렇게 발전했는데 자기 나라는 땅도 넓고 자원(석유)이 많음에도 아직도 발전에 대한 희망이 없다고 한탄하면서, 한국이 이처럼 빠르게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필자는 사적 견해임을 전제하면서 “우리 민족은 돈이 없거나 잘살지 못하는 것은 크게 부끄럽게 여기지 않지만, 교육받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어, 개인 차원에서나 정부 차원에서 교육 관련 사업에 많은 투자를 해 온 것이 한몫한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에서 과거시험이라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한 천여 년의 역사(958년, 고려 광종 9년)가 있다고 하면서,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 그것이 한국이 발전한 원동력이 아닐지 생각한다고 하자, 긴 침묵이 이어지더니 그는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의 무거운 눈물을 보았습니다.

    남아공 사람들의 엄숙한 흑진주 눈물

1990년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에 맞서 싸웠던 넬슨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2013)가 27년 만에 고도(孤島)에서 석방되고 1994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많은 사람이 남아공을 찾았습니다. 그 바람에 남아공행 비행기 표를 구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그 무렵 필자도 남아공행 러시에 동참해 요하네스버그와 케이프타운 등지를 여행하였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뭉클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남아공을 여행하던 중 그곳 일간지에서 TRC(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특종 기사를 다루고 있어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TRC 활동을 남아공이 넬슨 만델라와 그의 지지자의 노력으로 백인 통치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백인들이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여러 만행을 파헤치고 규탄하는 것이라고 짐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위원회의 이름이 ‘진실을 밝히고 화해하는 위원회’라고는 하지만 그들이 겪었던 혹독한 역사에 대한 보복 행위가 뒤따르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마침 TV에 생중계된 TRC 활동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300여 명이 모인 큰 회의실 앞쪽에서 지난날 경찰 간부였던 백인이 투박한 구두를 신은 채 원주민의 목을 짓누르고 구타하는 장면을 연출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범죄자 현장검증과 같은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습니다.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의 창시자 투투(Desmond Tutu, 1931~2021) 대주교(왼쪽, 영국 성공회)는 만델라가 석방되기 10여 년 전에 ‘인종 간의 화해(Racial reconciliation)’를 주창하였고, 만델라는 그와 함께 인종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데 공조한 사실이 크게 돋보였다. 투투 대주교는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사진 google 캡처.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의 창시자 투투(Desmond Tutu, 1931~2021) 대주교(왼쪽, 영국 성공회)는 만델라가 석방되기 10여 년 전에 ‘인종 간의 화해(Racial reconciliation)’를 주창하였고, 만델라는 그와 함께 인종 간의 갈등을 최소화하는 데 공조한 사실이 크게 돋보였다. 투투 대주교는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사진 google 캡처.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눈에 띄었습니다. 연출된 장면이라고 하지만 진술하고 있는 백인은 평상복 차림이었으며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결박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패널리스트처럼 자리한 피해 당사자나 보호자들로 보이는 많은 청·관중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이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응당 있을 법한 야유나 고성, 삿대질은 전혀 볼 수 없었으며 북받치는 울분을 큰 손으로 입을 가리고 힘겹게 참아내는 모습과 유난히 큰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는 모습은 실로 지켜보는 이의 가슴도 아프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피해자나 그 가족이 군중심리에 휩싸일 수도 있을 터인데 하나같이 무거운 침묵을 지키는 모습은 놀라움을 넘어서 감동이었습니다. 검은 얼굴 위로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마치 흑진주처럼 아름답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필자는 좌중의 시민들이 그 엄혹(嚴酷)한 자리에서 군중심리에 휩싸이지 않고 과잉 반응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 놀라운 시민 정신을 보았습니다. 필자를 크게 부끄럽게 하는 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네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지켜보는 것이 지겹기까지 합니다.

(1999년 ‘월간 에세이’에 실린 글과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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