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 원예디자인과 교수, 신구대 식물원 원장

전정일 교수
전정일 교수

가을이 본격적으로 깊어져서 엊그제 설악산의 단풍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 어느새 식물원의 나무들도 온통 울긋불긋하다. 식물원을 둘러보던 중에 어느 방문객이 발길을 붙잡고 식물원에 꽃도 없는데 입장료를 받는다고 화를 내시는 말을 고스란히 마음으로 삼킨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를 되뇌며, 겉으로는 조용히 꽃 좋은 계절에 다시 오시면 좋겠다는 말로 방문객을 달랜다.

사실 꽃을 보러 식물원에 오는 분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고 식물원은 그런 관람객들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해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면 꽃이 없는 식물, 그리고 식물원도 무척 좋아하게 된다는 것도 분명하다. 꽃이 부족한 식물원에 대해 변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른 봄 새싹이 보여주는 생명력, 한여름 장마철에 빗방울을 머금은 초록색 잎의 청초함, 늦가을 온갖 색상으로 화려하면서도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단풍, 한겨울 추위를 피하려고 나뭇가지에 만든 겨울눈의 귀여움을 천천히 하나씩 경험해보면 꽃이 없는 식물 그리고 식물원도 정말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다양한 색상으로 화려하면서도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신나무의 단풍.
다양한 색상으로 화려하면서도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신나무의 단풍.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던가 기억이 흐릿하지만, 서리 맞은 낙엽이 이월 봄꽃보다 더 붉다고 노래한 두목(杜牧)의 시구는 식물을 좋아하는 머릿속에 항상 울리는 구절이다. 일찍이 이렇게 유명한 시인도 사랑했던 가을 단풍은 실제로는 온대지방에 사는 식물이 한 해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과정이다. 식물이 연중 변해가는 모습을 잘 짜인 공연이라고 하면 단풍이 드는 것은 소위 ‘피날레’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정도의 화려함을 단풍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과정으로 단풍 드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식물이 만들어내는 색소들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식물이 생장하면서 만들어내는 색소는 기본적으로 녹색의 엽록소, 노란색과 주황색을 띠는 카로티노이드 그리고 붉은색과 보라색을 나타내는 안토시아닌이 있다. 엽록소는 식물이 광합성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색소이고 다른 두 색소는 식물이 강한 빛에 피해를 받는 것을 방지해주는 것이 기본적인 역할이다. 식물의 잎에는 보통 엽록소가 더 많아 카로티노이드와 안토시아닌의 색이 가려지기 때문에 녹색으로 보인다.

그러나, 늦가을 따뜻하고 맑은 낮과 기온이 7℃ 이하인 밤이 계속되면 엽록소가 파괴되어 녹색은 사라지고 카로티노이드 또는 안토시아닌의 색으로 단풍이 들게 된다. 이때 일교차가 커야 하는데 그 이유는 낮에 따뜻해서 잎이 광합성을 하여 당을 많이 생산하되, 밤 온도가 낮아져 잎에서 생산된 당이 잎 밖으로 운반되지 못하고 남아 있다가 안토시아닌 생산에 쓰이게 되면 안토시아닌의 붉은색이 더 짙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온도가 더 떨어지고 가을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식물원의 나무는 잎을 떨구고 풀은 살아남더라도 지하부만 남는다. 이때 나무든 풀이든 많은 양분을 잎으로부터 회수해서 몸에 저장한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회수하지는 못하고 이동이 쉬운 양분과 최소한의 물만 몸속에 저장하고 나머지는 모두 땅으로 돌려보낸다. 다음 해 봄 다시 흙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설사 땅으로 돌려보낸 만큼을 그대로 다음 해 봄에 회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떨구는 자체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추운 겨울 식물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 겨울에는 일조량이 줄고 온도가 떨어져 식물이 원활한 생장이 어렵기 때문에, 잎이 그대로 붙어있게 되면 생산 과정인 광합성은 하지 못하고 소비 과정인 호흡만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불필요한 잎을 떨어뜨려 자원을 절약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나무가 단풍 들고 낙엽을 떨구는 과정을 보면서 사람도 굳이 자기 용량을 초과해서 무언가를 잡으려 하지 말아야 함을 깨닫는다. 놓아야 다시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배운다. 그러나, 놓으면 다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놓지 못하는 것이 스스로 잘 아는 문제이기도 하고, 그래서 놓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화려한 단풍을 보면서 절제를 논하는 것이 왠지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놓아야 한다. 놓아야 하는 계절이니까. <다음 글은 11월 16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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