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 원예디자인과 교수, 신구대 식물원 원장

전정일 교수
전정일 교수

비가 내린 식물원, 습지에 사는 수련은 물방울을 동그랗게 뭉쳐 빠르게 흘려보낸다. 대부분의 식물이 그렇기도 하지만 특히 수련은 빗물이 잎에 머물 시간을 많이 주지 않는다. 미처 흘려보내지 못한 물방울은 서로 뭉쳐 잎과 꽃잎에 간신히 붙어있는 것 같다. 이렇게 수련은 물과 함께 살지만 물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방울이 붙어있는 수련의 꽃은 비가 그친 뒤에 햇빛에 반사되어 거무스름한 물을 배경으로 마치 밤하늘에 별처럼 빛난다. 

미처 흘러내리지 못한 빗방울이 뭉쳐 별처럼 빛나는 수련 꽃(신구대학교식물원 수련 품종 전시).
미처 흘러내리지 못한 빗방울이 뭉쳐 별처럼 빛나는 수련 꽃(신구대학교식물원 수련 품종 전시).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습지의 어두운 물 위로 별처럼 빛나는 꽃을 내던 수련이 이제 더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눈이 부시도록 햇빛을 반사하던 잎들도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에서 수줍은 듯하면서도 화려하게 식물원을 빛내주던 수련들은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다. 식물원을 거닐다 보면 여러 식물이 변해가는 모습에서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깨닫곤 한다. 올가을에는 이렇게 수련이 계절의 변화를 알려준다.

‘수련’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이름을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본다. ‘수련’이 물속에서 사는 걸 모두 다 알고 있어서, 그 이름에 들어있는 ‘수’가 ‘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듯이 수련의 ‘수’는 ‘잘 수(睡)’이다. 그러니까 풀어보면 잠자는 연꽃이라는 뜻이 되겠다. 낮에 피었던 꽃이 밤이 되면 꽃잎을 닫는 모습을 보고 잠자는 것으로 생각했던 옛 분들의 발상이 재미있다. 똑같이 물속에 살면서 비슷한 꽃을 피우는 연꽃에 비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수련의 학명은 'Nymphaea'로 시작하는데,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요정 님프(Nymph)가 수련에 깃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님프는 정령 또는 여신으로, 산이나 강, 숲이나 골짜기 등 자연물에 머물며 그것들을 수호한다. 신화에서는 일반적으로 춤과 노래를 좋아하며,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리스어의 보통 명사로는 ‘아가씨’ 또는 ‘신부’를 뜻하기도 한다. 이 학명을 붙인 사람은 바로 식물분류학의 아버지 ‘린네(Carl von Linné)’인데, 수련의 꽃을 보고 요정을 떠올린 이 위대한 식물학자의 낭만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련’의 이름에 재미있는 발상이 깃들어있는 것이 인간의 공통된 심성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런데, 수련은 단순히 ‘예쁜 꽃’ 이상인 것 같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옛날부터 수련을 신성하게 여겨왔다고 한다. 특히 하늘색 수련을 귀중하게 여겼다고 하는데, 꽃잎이 태양의 햇살처럼 퍼지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닫히며 토지와 생물에게 생명을 주는 나일강에서 자라기 때문에 더욱 귀중한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자료에 의하면 하늘색 이집트 수련은 정확하게 해가 뜨면 꽃이 피고 해가 지면 꽃이 오므라진다고 한다. 이 특징을 발견한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들이 숭배했던 태양신을 연상했을 것이 분명하다. 온갖 더러운 오염물질이 모여 있을 것 같은 혼탁한 물속에서 어떻게 수련은 그렇게 자기만의 아름다운 빛을 만들어낼까. 더러움 속에 살지만, 그 더러운 물을 거부하는 것만 같다. 수련은 수질 정화 능력이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염물질이 많은 물속에서 그 더러움을 거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오염물질들을 스스로 살아가는 데 활용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로 주변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보면 ‘성인’ 같은 분들의 모습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수련을 신성시했던 것이 오늘날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충분히 동의가 되는 점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혼탁한 것 같다. 그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함께 살되 정신마저 잃어서는 안 되고 그것에 물들어서도 안 될 것이다. 혼탁한 물속에서 자기 스스로 빛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주변까지 맑고 깨끗하게 만드는 ‘수련’ 같은 분들이 그립다. <다음 글은 11월 2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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