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낙 논설위원, 가천대 명예총장

이성낙 논설위원
이성낙 논설위원

이른 아침,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침묵의 시간을 흘려보냅니다. 문득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1895년 10월 8일 이맘때쯤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가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명성황후는 건청궁(乾淸宮) 내 곤녕합(坤寧閤)에서 주무시다가 당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지휘를 받은 일본군 한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등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폭도들은 왕비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 언덕 녹산 자리에서 태우고 그 자리에 묻었다. 이후 왕실에서 이를 거두어 경운궁(현 덕수궁)에 시신을 안치하고 국장을 지냈다.”(안내판) 역사는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부릅니다.

저들은 명성황후를 칼로 찔러 시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웠습니다. 당시 조선 고문관이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 1866~1942, 나중에 대만 총독)는 그의 보고서에서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조차 어렵다”라고 썼습니다. 얼마나 참담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프랑스 주간지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Le Journal illustré)>는 이를 ‘조선 왕비 암살 사건(LÁSSASSINAT DE LA REINE DE CORÉE)’이라는 표지 기사로 보도했습니다.

2007년 10월 어느 날, 그 수난의 아픔을 간직한 건청궁이 복원됐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거처한 공간치고는 단아했지만, 그 절제된 규모가 소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둘러보는데, 왠지 무척 생소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있어야 할 그 무엇이 없는 듯 허전하기까지 했습니다.

조선의 황후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현장인데, 작은 안내판을 제외하곤 그 흔적을 짐작할 만한 게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너무도 ‘깨끗해서’ 놀랍기까지 했습니다. 건청궁을 복원하면서 곤녕합이 바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장소임을 시각적으로 처리하였어야 하였다는 아쉬움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 만행의 현장을 보는 방문객들에게 역사의 교훈을 일깨울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건청궁을 나와 경복궁의 북쪽 신무문(神武門)에 다다르자 청와대 정문이 보였습니다. 그때 건청궁의 위치가 바로 옛 국립현대미술관 터였다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필자는 고교 시절 그 신무문을 거쳐 현대미술관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말하자면 일제가 건청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명성황후 시해 장소를 무심히 짓밟고 다녔으니 말입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의 현장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무서우리만큼 생생하게 그 참혹했던 역사를 입체적으로 고발합니다. 음습(陰濕)하기까지한 역사의 현장을 관람하다 전시장 출구에 다다르면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Forgive, but not forget)”라는 유의 글귀를 만나곤 합니다. 그걸 볼 때마다 필자는 그 문장이 품고 있는 깊은 성찰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깁니다.

수년 전 필자는 한국을 방문한 독일 친구에게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저지른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떠오른 장소가 고작 서대문형무소뿐이라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동시에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문구가 떠올라 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발할 것도 없는데 무엇을 용서하고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지금이라도 건청궁을 설명하는 시설물에 그곳이 어떤 역사의 아픔을 품고 있는 장소인지 명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말이 우리에게도 의미 있게 다가올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하면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 1907)’을 가장 먼저 떠올립니다. 필자도 그렇습니다만, 제 경우는 그 작품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그의 대작 ‘게르니카(Guernica, 1937)’가 생각납니다. 무엇보다 역사의 아픔과 함께 인간의 잔혹성을 규탄하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Francisco de Franco, 1892~1975)가 나치 독일 히틀러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 분리주의자들의 거점인 바스크(Basque) 지방의 중심지 게르니카를 공격합니다. 이때 독일의 비행 편대가 멀리서 날아와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하지요. 나치 독일 항공대로서는 첫 원거리 비행 폭격이기도 했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Quernica(1937). Oil on canvus, 3.49m x 7.77m, Museo Reina Sofia Madrid. 자료: Google 캡처
파블로 피카소, Quernica(1937). Oil on canvus, 3.49m x 7.77m, Museo Reina Sofia Madrid. 자료: Google 캡처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피카소가 이 참변의 소식을 접했고, 캔버스에 울분을 토해낸 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 ‘게르니카’입니다.  필자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직접 보고 감흥에 빠져 있을 무렵, 한국전쟁의 상흔(傷痕)을 어루만진 김은국(金恩國, Richard Kim, 1932~2009)의 소설 《순교자(殉敎者, The Martyred)》(1964)를 벅찬 가슴으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현대 문학 작품이, 그것도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이 15개 국어로 출판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 1917~1985)이 한국전쟁의 아픔을 다룬 ‘순교자’를 극찬하는 서평을 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 1964)에 기고한 것이 많은 것을 시사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회화에는 그런 역사의 현장을 담은 작품이 없을까 생각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우연히 화가 박생광(朴生光, 1904~1985)의 작품 ‘명성황후’를 만났습니다.

1990년대 경기도 용인에 자리한 신생 이영미술관을 찾아간 것은 박생광, 전혁림(全爀林, 1915~2010), 정상화(鄭相和, 1932~)의 작품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했다는 얘기를 들어서입니다. 박생광은 종이에 채색하며 샤머니즘에 반(半)추상, 반구상 기법을 혼용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대형 작품(200×399cm) 하나가 필자의 시선을 강하게 끌었습니다. 바로 큰 벽면을 가득 채운 ‘명성황후’였습니다. 

박생광(1904~1985), ‘명성황후’, 1984. 종이에 채색. 200×399cm. 이영미술관 제공
박생광(1904~1985), ‘명성황후’, 1984. 종이에 채색. 200×399cm. 이영미술관 제공

다름 아닌 을미사변 현장을 화폭에 담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림 중앙에 한옥이 거꾸로 서 있어 당시의 혼란을 한눈에 느낄 수 있고, 못다 핀 연꽃 봉우리를 보듬어 안은 소복 차림의 명성황후가 편안하게 눈을 감은 채 후광(後光)을 베개 삼아 누워 있습니다. 그 옆에는 원통함을 호소하는 두 여인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이고, 그림 하단에는 살해당한 호위무사 홍계훈(洪啓薰, 1842~1895)의 비통해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우측에는 사무라이들의 매서운 눈초리와 휘두르는 칼이 번뜩입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청황적백흑(靑黃赤白黑)의 오방색으로 가득하지만, 악몽을 꾸듯 붉은 기운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필자는 이 ‘명성황후’만큼 일제가 우리에게 범한 극악하기 그지없는 범죄사실을 극(劇)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울림이 큰 작품입니다. 그러기에 국내 중·고등학교 미술 교과서 또는 역사 교과서에 교육자료로 활용하면 어떠할까 생각합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견주어도 인간의 포악성을 경고하는 작품으로 ‘명성황후’는 아주 다른 차원의 빼어난 작품이라 믿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간절함과 용서는 아주 다르면서도 궤(軌)를 같이하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을미사변을 일으킨 후 저들은 시해사건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호도하기 위해 갖은 간계를 부렸습니다. 또 ‘부덕한 황후’를 폐한 데 이어 새로 간택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리도록 한 게 사건 일주일이 지난 이 무렵입니다. 을미사변을 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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