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중 논설위원, 가정경영연구소장,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7월 말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내가 나이가 든 탓인지, 코로나 후유증인지 올해 돌아가신 분이 유독 많다. 친구나 지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는 수시로 받았고, 친구 아내와 두 명의 친구도 떠나고 70대 중반의 대부님도 돌아가셨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하면 그러려니 하지만 60대인 친구들의 사망과 배우자 사망 소식은 아직도 낯설다.

장모님이 돌아가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지 정교한 설계도를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다.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려 보고 내가 진정 원하는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내 의사를 가족에게 명확하게 밝혀두는 일이다.

9년 전 어머님 돌아가실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곡기를 끊는 일’에 대해서도 열심히 탐색 중이다. 스스로 곡기를 끊은 주변 어르신이나 곡기를 끊고 열반으로 들어간 고승, 임금이나 나라를 잃은 뒤, 곡기를 끊는 것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자 했던 선비나 독립투사에 관한 얘기는 많이 들어보았다.

음식을 씹을 수 있고 삼킬 수 있는데 곡기를 끊겠다는 것은 아니다. 회복할 수 없고 일상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대소변을 받아내는 수고를 시키면서까지 무의미한 수명을 늘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병을 고쳐 보겠다고 온갖 검사와 치료, 수술까지 다 했지만 소용이 없어 죽음을 맞는다면 오히려 그 시간과 수고, 비용을 보다 의미 있는 일에 쓰면서 내 삶을 조용히 정리하겠다는 것이다.

응급실, 중환자실, 요양 병원 그리고 다시 응급실, 중환자실을 오가다 죽음을 맞는 ‘연명 셔틀’은 피하고 싶다. 의사 입장에서는 자신의 본분이라고 하겠지만 지나치게 치료에만 매달리며 환자나 가족의 입장은 배려하지 않고 비용과 고통만 키우는 ‘죽음의 의료화’는 고통 없이 삶을 마무리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제는 질병의 치료보다 고통과 증상을 완화하고 환자와 가족의 더욱 평안한 삶을 유지해 주는 완화의료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90% 이상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는다지만 나는 가능하면 집이나 호스피스 병원에서 임종하고 싶다. 집에서 임종한다고 모든 간병을 가족에게 맡기겠다는 건 아니다. 가정형 호스피스나 방문 진료, 방문 간호를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사정이 여의찮다면 담담하게 요양 병원에 가겠다고 오래전 아내와 약속했다. 면회도 제대로 안 되는 중환자실에서 온갖 소음과 고통에 시달리다 가족과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 나누고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다.

오래전에 아내와 함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작성해서 아이들에게 나의 진정한 뜻을 알려 주었다. 아이들은 처음에 불편해했지만, 아내와 우리의 죽음에 대해서 수시로 많은 얘기를 나눈다. 죽음 얘기만 유독 회피하거나 터부시할 일은 아니다. 죽음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품위 있게 죽음을 맞는 사회적 분위기를 마련해야 한다.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인공호흡기, 항암제 투여, 그리고 체외 생명유지술, 수혈, 혈압상승제 등은 원치 않는다고 자기 의사를 미리 밝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도 무의미한 인공영양 공급을 거부한다는 내용은 없다. 병원에서는 영양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퇴원을 종용한다. 인공영양 공급으로 건강을 회복하거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 결국 병원에서 생을 마감해야 한다면 스스로 곡기를 끊는 것이 더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까?

노쇠하고 질병에 걸리면 말초 혈관이 가늘어져 주사 놓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장기간 혈관으로 영양을 공급할 수 없어서 십이지장이나 위, 또는 소장으로 직접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콧줄을 삽입하는데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통증이 심하여 환자가 자기도 모르게 콧줄을 뽑아버리는 경우도 많아 손을 묶기도 하는데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곡기를 끊는 게 어디 쉽냐는 사람도 많지만, 전문의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다고 한다. 처음 며칠은 어렵고 탈수 현상이 오지만 지방과 근육이 소모되면서 생기는 케톤산이 혈중에 많아지면 뇌는 오히려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렇게 편안하고 평화로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수분 공급까지 중단하면 더 일찍 사망하지만, 곡기를 끊으면 환자의 몸 상태에 따라서 20일~30일 정도 생존할 수 있다고 한다.

기력과 의식이 떨어져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고 대소변을 누군가 받아내야 하는 처지가 계속되면 나는 곡기를 끊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상 영양분과 수분 공급을 하지 않는 병원은 처벌받지만, 집이나 호스피스 기관에서는 가족의 합의가 있으면 행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법인 의사 조력 자살을 스위스나 해외로 나가 시도할 생각은 없다.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못할 짓을 시키는 것도 아니며 가족의 동의를 얻어낸 다음 내 의지로 행할 수 있다면 곡기를 끊는 일이 차선의 선택이라고 믿는다. 보고 싶은 사람과 평안하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의미 없는 인공영양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 부모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보내드리는 일임을 아이들에게 설득할 생각이다.

어느 날 갑자기 곡기를 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충분히 대화를 나눈 후, 가족과의 합의로 내린 결정이라면 무조건 반대만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남아있는 가족이 그 과정을 지켜보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가족과의 대화를 통해 반드시 사전에 합의를 하여두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계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에 대해 찬성하진 않는다. 물론 생명 경시 풍조와 악의적인 안락사를 예방하기 위해 치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자신이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의미 없는 인공영양 공급을 거부할 권리에 대해서 의료진과 법률을 다루는 사람, 현장 실무자들이 힘을 모아 더 활발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할 때다. 모든 생명에 시작이 있다면 반드시 끝도 있는 법, “삶의 최고 발명품은 죽음”이라고 했던 미국 애플사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1955~2011)가 2005년,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했던 얘기가 가슴을 때린다.

“곧 죽게 된다는 생각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큰 도움이 된다. 사람들의 기대, 자존심,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거의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이다.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무언가 잃을 게 있다는 생각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 당신은 잃을 게 없으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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