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구 언론인,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석구 언론인
이석구 언론인

“월드컵 축구에서 우승을 했더라도 일본에 졌다면 무의미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한일 대결에서 꼭 이겨야 한다. 식민지 시절의 굴욕과 콤플렉스가 패배를 용서치 않는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육상, 수영, 구기 등 스포츠 전체를 놓고 보면 일본이 한 수 위다. 올림픽 성적이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인 축구만은 한국이 더 강했다. 역대 한일 대표팀 간 전적도 42승 23무 16패로 우리가 우세했다. 축구는 우리의 자존심이었다.

이런 자존감이 무너지고 있다. 일본은 지난 10일 월드컵 4회 우승국인 독일과의 축구대표팀 평가전에서 4대 1 대승을 거뒀다. 일본의 최근 대표팀 평가 전적은 4승 1무 1패다. 반면 한국은 1승 3무 2패다. 한국의 월드컵 4강 신화는 옛날얘기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월드컵에서 2회 연속 16강에 올랐다. 우리도 카타르 월드컵(2022)에서 16강까지 갔지만 ‘일본은 안정적 16강’이고, ‘우리는 16강에 도전하는 실력’이다. 국제축구연맹 순위도 한국은 28위, 일본은 20위다. 최근 한일 대표팀 간 전적도 2회 연속 0대 3패다(청소년대표 포함하면 5연속 0대 3패). 2011년 이후 전적은 7전 2승 1무 4패로 일본에 열세다. 일본이 치밀하게 장기 계획을 세워 축구를 육성한 결과다.

일본이 자랑하는 스트라이커 가마모토 쿠니시게(釜本邦茂,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득점왕)는 일본이 1985년 11월 3일 멕시코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한국에 1대 0으로 패배, 월드컵 진출이 좌절되자 “일본에 프로 축구가 생기지 않으면 일본은 한국을 영원히 이길 수 없다”며 울먹였다. 그들은 그 후 8년간 절치부심, J리그 창설을 준비했다. 우리는 이미 1981년부터 K리그를 출범, 운영하고 있었지만 일본은 서두르지 않았다. 축구 전용구장을 만드는 등 착실한 준비 끝에 1993년 J리그를 출범시켰다. 한편 남미와 유럽에는 유소년들을 보내 차세대 선수를 양성했다. 지금 일본의 프로축구 리그는 3부까지 58팀(한국은 2부까지 25팀)이다. 세미 프로리그까지 합하면 모두 9부 리그에 82만여 명(한국 9만여 명)의 축구선수가 활약하고 있다. 일본 축구는 이처럼 기초가 튼튼하다. 일본 축구협회는 ‘2050년까지 축구인구 1000만 명, 100년 내 월드컵 우승’이라는 장대한 구상까지 세워놓고 있다.

일본은 단기적 성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장기적 목표를 세우고 차근차근 이를 실천한다. 모리야스 하지메(森保一) 일본 축구대표팀 감독은 2018년부터 대표팀을 맡고 있다. 일본 축구협회는 모리야스 감독 초기에 대표팀 성적이 좋지 않았으나 그를 교체하지 않았다. 그는 스타플레이어 출신도 아니다. 외국인 감독을 데려와 걸핏하면 갈아치우는 우리와 다르다. J리그는 관중이 꽉 차는 반면 K리그 관중석은 휑하다. A매치에만 관중이 몰린다. 선수는 관중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이 같은 K리그와 J리그의 차이가 한일 축구 역전을 가져왔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현재 일본의 고교 야구팀은 3818개나 된다. 한국은 겨우 95개 팀에 불과하다. 고교야구가 튼실하지 못하면 성인야구도 없다. 일본은 NHK가 고시엔(甲子園) 대회(전국 고교야구대회)를 예선전부터 결승까지, 아침 8시부터 전부 중계한다. 그런데 우리 고교야구는 어떤가? 야구대표팀 감독을 국회로 불러 수모까지 주며 정치권이 간섭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일본을 우습게 보고 있다. 이제 그들보다 우리가 낫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K팝, 드라마, 반도체, 가전, 조선 등의 괄목할 만한 성장 덕분이다. 그러나 이는 겉만 본 것이다. 소수 엘리트 중심의 우리 스포츠처럼 이들 분야도 기초가 그리 실하지 않다. 우리 반도체 제조 장비의 절반은 일본 제품이다. 과학기술은 물론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장인정신, 공중도덕 등 기초체력에서 일본은 저만치 앞서간다. 일본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25명(전체 29명)으로 세계 6위다. 일본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 기본 매뉴얼과 원칙이 있다. 기본을 중시한다. 일본이 메이지(明治) 유신(1867) 후 근대화에 매진,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잇달아 승리로 이끌면서 열강 반열에 그냥 올라간 것이 아니다.

일본을 찬양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겉치레가 아니라 내실로, 명분이 아니라 실용으로 극일(克日)을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강자에게만 고개 숙이는 일본을 이기는 길이다. 죽창가 부르고 반일(反日) 고함만으로 일본을 능가할 수 없다. 일본 축구의 발전처럼 장기적 안목으로 계획을 세우고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 부실한 기초 위에 고층 건물을 지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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