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 원예디자인과 교수, 신구대 식물원 원장

전정일 교수
전정일 교수

언젠가부터 일정표를 하루에도 몇 번씩, 그리고 한 번 볼 때마다 한두 달 후 날짜까지도 자세히 살펴보는 습관이 생긴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뭔가 해야 할 일을 놓치지는 않았을까 불안감이 밀려오곤 한다.

오늘은 결국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함께 식물 공부를 하자고 약속했던 분들께 취소 요청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책감과 죄송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한편으로는, 식물을 아주 좋아하는 분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나에게도 행복한 시간을 주기에 아쉬움이 크다.

요즘 이렇게 기왕에 했던 약속을 취소해야만 하거나 일 자체가 허술해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식물원 원장 보임을 다시 맡게 된 탓도 있겠지만, 너무 쉽게 많은 약속을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을 하게 된다.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순간 일은 시작되는 것인데, 약속을 쉽게 하니 일이 허술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식물의 생장이 씨앗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약속은 모든 일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마치 식물의 씨앗이 부실하면 튼실한 식물로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약속이 허술하면 일도 부실해지는 것이다.

식물은 씨앗을 만들 때 아주 신중한 과정을 거친다. 식물이 씨앗을 만드는 과정의 각 단계에서 이러한 신중함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수술에서 성숙한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도달하는 수분 단계를 살펴보자. 꽃가루를 옮겨줄 적당한 매개자, 그러니까 바람이 좋을지, 곤충이 좋을지, 심지어 물이 적당한지를 찾는다. 식물학에서는 이것을 각각 풍매화, 충매화, 수매화라고 부른다.

매개자를 신중히 고르는 것뿐만 아니라, 꽃가루가 어디에서 왔는가도 신중히 따져본다. 암술머리에 도달한 꽃가루가 꽃가루관을 내어 밑씨에 도달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정핵을 밑씨의 난핵과 만나게 해주는 수정 과정에서도 꽃가루를 선별하는 신중함을 보이는 것이다. 어떤 식물 종류는 자가수정(自家受精)이라고 해서 한 개체의 꽃에서 온 꽃가루만을 받아들이는가 하면, 어떤 식물 종류는 타가수정(他家受精)이라고 해서 다른 개체에서 온 꽃가루만을 받아들인다. 타가수분하게 되면 새로운 유전자를 받아들이게 돼 그 씨앗은 유전적으로 개선된 식물로 자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많은 식물이 타가수정의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타가수정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즉 자가수정을 회피하기 위해서 식물은 다양한 방법을 쓰기도 한다. 같은 꽃에서 암술과 수술의 성숙 시기를 달리하거나, 한 그루에서 암꽃과 수꽃이 나뉘어 피고 그 위치를 달리하기도 하고, 아예 암꽃과 수꽃이 서로 다른 그루에 달리기도 한다.

​2년에 걸쳐 성숙하는 곰솔의 솔방울(가지 끝의 붉은색이 막 만들어진 1년 차, 가지 중간에 아직 성숙 중으로 조각이 닫힌 2년 차, 가지 아래쪽은 지난가을에 씨앗을 내보내고 빈 솔방울만 남은 3년 차).​
​2년에 걸쳐 성숙하는 곰솔의 솔방울(가지 끝의 붉은색이 막 만들어진 1년 차, 가지 중간에 아직 성숙 중으로 조각이 닫힌 2년 차, 가지 아래쪽은 지난가을에 씨앗을 내보내고 빈 솔방울만 남은 3년 차).​

방법을 달리하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 심사숙고하는 식물들도 있다. 수분(受粉)한 후에 수정(受精)까지 또는 씨앗이 성숙할 때까지 긴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나무는 2년에 걸쳐 씨앗이 성숙하는데, 첫해에는 솔방울이 수분만 이루어진 후에 정지된 상태로 머물다가 이듬해 봄 유전자가 결합하는 수정이 이루어지고 가을에 가서야 씨앗이 성숙한다. 도토리가 크게 달리는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도 2년에 걸쳐서 씨앗과 열매가 성숙한다.

식물은 충실하고 개선된 씨앗을 만들기 위해 이렇게 다양한 방법을 쓸 정도로 신중하다. 충실하게 만들어진 씨앗이 튼실한 식물로 자라나듯이, 약속한 일을 충실히 해내기 위해서는 식물이 씨앗을 만들듯 약속할 때부터 신중해야 하겠다. 좋은 마음에 거절하지 못하고 약속을 하고는 지키지 못한다. 소나무처럼 2년을 기다리기는 어렵겠지만, 약속할 때 깊이 생각하고 신중해야 하고 때로는 과감히 거절도 해야겠다. <다음 글은 10월 5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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