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논설위원,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함인희 논설위원
함인희 논설위원

감정노동 개념을 최초로 제시했던 미국 사회학자 앨리 혹실드(Arlie R. Hochschild, 1940~ )가 2016년 펴낸 책 ‘내 땅의 이방인들’을 최근 밑줄 치며 읽었다. 미국의 스토리와 한국의 현실 사이에 겹치는 대목이 많아 연신 느낌표를 달면서 말이다.

1960년,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만일 당신의 자녀가 당신과 반대편 정당 지지자를 배우자로 맞이한다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은 5% 내외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0년 조사에서는 공화당 지지자의 40%, 민주당 지지자의 33%가 “그렇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최근 미국에서는 파티즘(party-ism)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고 한다. 과거엔 인종이 미국을 두 개로 갈라놓았다면, 오늘날은 지지 정당이 민주당이냐 공화당이냐에 따라 두 개의 미국으로 나누어짐을 지칭한 표현이라 한다. 예전 미국인들은 더 좋은 직장, 한 푼이라도 값싼 집, 기왕이면 온화한 기후 등을 찾아 이주했는데, 지금은 자신과 동일한 정당을 지지하는 이웃을 찾아 이사한다고 한다.

2014년 1만 명 이상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조사에서는, 강성 지지층일수록 상대당 지지자가 단순히 ‘틀렸다’고 인식하는 것을 넘어 ‘잘못된 정보에 세뇌되어 미국의 안녕과 질서를 위협한다’고 믿는 것으로 밝혀졌다. 양당 지지자 사이의 균열은 이제 도저히 메꿀 수 없는 심연이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 전역에서 공화당을 지지하는 빨간 주(red states)가 민주당을 지지하는 파란 주(blue state)보다 대체로 가난하고, 10대 출산율, 미숙아 출산율, 이혼율, 비만율, 트라우마 관련 사망률은 더욱 높고, 산업 공해도 심각한 반면, 학교 진학률은 떨어진다는 것이 각종 통계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한데 정작 정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주가, 작은 정부와 시장경제를 앞세우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거대한 역설’(Great Paradox)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마치 동네 가게 주인이 월마트를 지지하고, 작은 책방 주인이 아마존을 지지하는 셈이다. 혹실드는 미국이 직면한 거대한 역설을 풀기 위해 5년여에 걸친 리서치 여행을 감행한다.

이 역설을 푸는 과정에서 그녀는 ‘공감 장벽’(empathy wall)과 ‘깊은 이야기’(deep story)라는 개념이 꽤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제안한다. 여기서 공감 장벽이란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 두터운 장벽이 생긴 나머지, 나와 견해가 다른 이들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거나 강한 적대감을 표출함을 의미한다. 처음엔 공감 장벽쯤이야 쉽게 넘어설 수 있으리라 가정했던 혹실드는, 트럼프 지지자들을 만나면서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커녕, ‘내 땅의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노라 고백하고 있다.

결국 상대방 목소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각자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깊은 스토리’를 길어올려야 하는데, 혹실드가 각고의 노력을 통해 찾아낸 스토리는 대체로 다음 세 범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첫째로 민주당은 자신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세금으로 걷은 후, 엉뚱한 곳에 뿌린다는 불만이었다. ‘게을러빠진 공무원들 월급’과 ‘실업 급여 및 각종 복지 혜택을 받으려 온갖 꼼수를 쓰는 도덕적 해이에 물든 마이너리티 집단’으로 인해 세금이 줄줄 새고 있는 현실을 절대 방치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들은 가족과 종교의 가치를 소중하게 지켜왔다고 생각하는데, 민주당은 동성결혼을 찬성하고 종교를 핍박하기에 지지를 철회한다는 것이다. 기업도 나를 버리고 국가도 나를 돌봐주지 않을 때 그나마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종교와 가족뿐이었는데, 나름 종교와 가족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정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셋째로,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민주당 지지자들은 우리를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동성애 혐오자로 낙인찍고, 꼴통 보수이자 레드 넥(red neck;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미국 농촌의 백인을 비하하는 말)이라고 비난하는데, 그때마다 심한 모욕감에 좌절하고 엄청난 분노를 느낀다는 것이다. 자신은 절대로 유색인종을 차별해본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주의에는 당신도 책임이 있다고 윽박지르면서, 우리의 자존심과 명예를 가차없이 짓밟는다는 것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지긴 했지만, 사사건건 나라가 둘로 쪼개져 폭언과 모욕을 일삼는 우리의 현실과 오버랩되면서 이런저런 의문이 고개를 든다. 자기 편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영웅화하고 신비화하면서, 다른 편을 향해서는 경멸과 적대감, 비난과 비하를 서슴지 않는 그 저변에 흐르는 우리네 ‘깊은 스토리’는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을 찾아야 공감 장벽을 허물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도무지 길이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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