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중 논설위원, 가정경영연구소장,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편지 가게가 문을 열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다. 편지 가게를 누가 이용할까 싶었는데 서울 연희동에 이어 성수동에 2호점을 냈다고 한다. 각종 편지지와 편지 봉투, 필기도구, 관련 상품으로 예쁘게 꾸며 놓고 편지를 쓸 수 있는 테이블도 마련해 두었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서 비치함에 넣은 뒤 다른 사람이 미리 써 둔 편지 한 통을 가져가는 펜팔 서비스의 반응이 꽤 좋단다. 젊은 사람들에겐 편지를 쓰고 답장을 받아보는 경험이 신선한 문화로 느껴지나 보다. 우체국에서만 파는 줄 알았던 우표도 살 수 있었다.

다양한 우표를 사러 광화문우체국엘 들렀더니 10원, 50원, 100원, 250원, 380원, 430원, 520원, 1000원짜리 우표와 기념우표도 팔고 있었다. 요즘은 편리함과 비용 절감을 위해 우표 대신 우편 요금 라벨지로 대신해 버리지만 우표 수집이 유행했던 시절, 나도 잠시 우표 모으기에 열심이었던 적이 있다. 동네 주변을 둘러봐도 우체통을 찾을 수가 없어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한 동에 한 개나 될까, 빨간 우체통은 벌써 귀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언제 편지를 썼던가 싶을 만큼 요즘은 편지 쓸 일이 없어졌다. 생일이나 어린이날,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 크리스마스, 연말이나 연초, 기념일에나 썼던 편지나 카드마저 문자나 이메일, 영상통화로 대신해 버리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편지를 가장 많이 썼던 건 군대 복무 중일 때다. 막내아들을 떠나보내고 울적해하시던 어머님께 일주일에 한두 통은 꼭 보내드렸다. 전남 장성에서 광주까지 전령으로 오가며 부대원들에게 편지를 배달해 주던 서무병 시절, 가족이나 친구, 애인의 편지로 고된 훈련을 견뎌내며 대대에서 갖고 오는 편지 한 통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부대원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1989년 유학 차, 가족들보다 1년 먼저 영국에 가 있을 때 아이들과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꽤 많다. 1990년대 중반 6개월간 핀란드에 혼자 공부하러 가 있을 때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도 적지 않다, 편지에 다 담을 수 없는 사연은 매일 조금씩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다가 보내곤 했다. 아내는 한국 신문을 꼬박꼬박 보내줘 고국 소식에 목마른 나를 달래주었고. 현관문의 투입구로 편지와 신문이 떨어지는 소리만 고대하던 헬싱키에서의 그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혼자서 떠난 스페인 여행, 북유럽 여행, 그리고 인도 여행 때 숙소와 카페, 야간 침대 열차에서 쓴 편지와 그림엽서들을 보관해 두지 않은 게 못내 아쉽다. 생일에 아이들이 무슨 선물을 받고 싶으냐고 물으면 난 늘 ‘기인 편지’라고 대답했었다. 나에겐 그 어떤 것보다 반갑고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감동적인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으로 직접 쓴 편지는 시대의 뒤편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거나 우체국에 가서 편지를 부쳐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젊은이들에게 편지는 느리고 불편하기만 한 매체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떠올리고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다음, 그 사람을 위한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고르고 필기구를 준비한 후, 책상에 앉아 서두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는 순간은 문자나 이메일로는 맛보기 어려운 시간이다. 빠르고 편리한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를 뜯고서 답장을 읽어 내려가는 기쁨은 참 특별한 경험이다. 보관해 둔 편지를 꺼내 읽으며 그 속에 담긴 추억과 그들이 기억하는 나의 모습, 그리고 그 시절까지를 되돌아본다. 누군가는 편지를 ‘수신인 혼자서만 읽는 호사스러운 문학’이라고 했던가.

상담을 청하는 사람들에게 편지 보내기를 권하곤 한다. 정작 대화할 시간조차 없거나 아예 얼굴 볼 기회마저 없는 가족에게 소통은 참 어려운 과제다. 대화는 많이 하는데 소통이 안 되는 가족도 있고, 대화를 시도하다 오히려 싸움이 되기도 한다. 정작 내 감정이 어떻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무엇 때문에 서운했는지 이야기도 안 하고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상대방을 탓할 일이 아니다. 먼저 내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편지의 장점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거부당하거나 상대방이 중간에 말을 자르고 부인하고 공격하는 일 없이 일단은 나의 마음을 상대방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얼굴을 보며 말로 하기에는 어색하거나 쑥스러운 표현도 편지로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편지에는 주로 긍정적인 내용을 담기 마련인데 고백이나 사과할 때도 참 유용한 수단이다.

고은 작사, 김민기 작곡의 ‘가을 편지’가 흐른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원곡자로 알려진 최양숙 외에도 이동원, 최백호, 양희은, 조관우, 최성수, 강인원, 적우, 박효신, 솔라, 김종국, 보아 등 수많은 가수가 이 노래를 불렀다. 가을이 묻어나는 이동원과 최백호의 목소리도 좋지만 꾸밈이 없고 깊은 울림을 주는 김민기의 ‘가을 편지’ 또한 독특한 매력이 있다.

이 가을, 그리운 누군가에게 편지 한번 써 보는 건 어떨까. 달 밝은 밤이나 문득 잠이 깬 새벽도 좋고 숲이나 강이 보이는 카페에서도 좋다. 내가 보낸 편지가 누군가의 가슴을 적시고 정겨운 답장이 되어 돌아온다면 올겨울이 조금은 훈훈해지지 않을까. 올해 초등학생이 된 손녀에게 편지를 한 통 보내야겠다. 그것도 학교로. 얼마나 좋아할까, 벌써 고 녀석의 함박웃음이 들린다. 미국으로 발령받아 떠나 1년이 다 돼 가는 아들에게도 “보고 싶은 우리 아들, 바다야”로 시작하는 기인 편지 한 통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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