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훈 논설위원, KBSI 분석과학마이스터

이석훈 논설위원
이석훈 논설위원

지난 6월 28일 2023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대통령은 정부 연구개발예산이 이권 카르텔에 의해 나눠먹기식으로 집행되고 있다고 질타하며, 제로베이스에서 예산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 한마디에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던 정부가 문제의 원인을 외면한 채, 정책이라고 내놓은 것은 연구개발예산 배분의 비효율성 책임을 연구 현장으로 떠넘기는 구태의연함이었다. 이를 바라보는 과학기술계는 우려를 넘어 절망하고 있다.

모든 과학자들이 특정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매도하며 연구 의욕을 위축시키고, 연구기관 간 유사·중복 기능의 통폐합 카드로 엄포를 놓더니, 1200여 개의 R&D(연구개발) 사업 중 나눠주기식 카르텔 성격이 있거나 유사·중복으로 판단되는 사업 등을 중심으로 108개를 통폐합하기로 했다고 한다. 더하여 상대평가를 전면 도입해 하위 20% 사업을 구조 조정하고, 연구 수당을 축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더니, 급기야 내년도 정부 주요 R&D 예산을 13.9%(3조4500억 원) 삭감된 21조5000억 원으로 의결하고는 연구기관의 주요 연구사업까지 예산 일괄 삭감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는 5년마다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과학기술 발전에 관한 중·장기 정책목표 및 기본방향을 제시하는 최상위 계획인 ‘과학기술기본계획(제5차 과학기술기본계획 2023~2027)’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국가연구개발전략을 추진한다. 하지만, 국제적인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짧은 기간에 조 단위의 예산을 투입함으로써 연구개발의 비효율성을 잉태하고 있다. 인공지능 바둑, 중소기업 육성,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챗GPT에 이어 최근 감염병이 그 대표적인 사례로, 정부가 연구개발 카르텔의 진원지로 지적한 분야와 일치한다.

부처별로 소속 R&D 전문기관을 두고 정부 R&D 예산을 기획·배분·관리하는 역할을 맡기고 있지만, R&D 기획역량이 부족한 기관에선 인맥이 닿는 연구자들을 동원하여 연구개발사업을 기획하면서 선수-심판론을 초래하고 있어 카르텔 아닌 카르텔이 형성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안고 있다. 또한 단기간 대형과제 기획이 어려운 상황에서 성과에 대한 책임 회피를 위해 여러 과제로 쪼개 파편화시킴으로써 대형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연구기관 예산제도 중심에 PBS(과제중심 예산제도)가 있다. 출연금으로 부족한 연구비와 인건비를 과제 수탁을 통해 보충하는 예산제도로, 1996년 도입 당시의 예산 투명성 및 연구 자율성 확대라는 취지와 달리 정부의 단기성과 요구에 따라 파편화된 과제를 수행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예산 비효율성을 초래하고 연구 자율성을 규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래서 20년 넘게 제도혁신을 반복하고 있지만, 여전히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고 있다.

기관 전체 연구개발예산의 50% 내외인 연구기관의 기본사업은 국가전략 연구개발이라는 고유 임무를 수행하는 사업으로써 중·장기적 계획에 따라 지속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데, 중간에 예산이 삭감되면 사업계획이나 일정을 수정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성과 역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부는 R&D 예산 삭감에 따라 기본사업의 일괄적 예산 삭감을 강요하고 있어, 연구자들은 연구기관 본연의 임무에 몰입하기보다는 연구과제 수주에 내몰리는 상황을 예상하며 심히 우려하고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제도적 개선 고민도, 지향하는 비전도 없이 예산 삭감부터 시작하는 정부의 안일한 대처방안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관성처럼 해오던 과학기술 분야의 길들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R&D다운 R&D를 해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자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을 지향하는 연구를 하고 싶지 않은 연구자가 얼마나 되며, 도전적·창의적 연구에 몰입하고 싶지 않은 연구자가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을 위한 자원이 부족하고,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 속에 적과 대치하고 있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선 과학기술만이 유일한 답이다. 그래서 역대 리더들도 국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정부와 연구자들의 노력이 합쳐져 선진국들의 과학기술을 따라가는 추격형 연구개발에 성공하면서 선진국에 진입했다.

과학기술계에선 이미 선도형 연구개발을 시작했다. 목적지는 있지만 처음 가는 길이기에 가는 길은 모른다. 가는 길을 개척하며 가야 하기에 걸음이 더딜 수밖에 없다. 시간에 쫓긴다고 아무 길이나 갈 수도 없다. 가다가 앞이 막혀 실패할 수도 있다.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선 여러 방안을 시도해봐야 하고 혼자서 시도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기에 중복은 시간을 단축하는 필요 수단이 된다.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선 다양한 아이디어도 필요하기에 다른 이들과 협력도 해야 한다. 그래서 선도형 연구개발에 있어 효율성, 중복, 자율성 규제는 과학기술을 퇴보시키는 무지의 소산이다.

정부가 과학기술계를 질타할 때 항상 들고나오는 칼이 투자 대비 성과 부족이다. 변해가는 과학기술의 추세를 따르지도 못하고, 연구 현장의 소리를 듣지도 않고, 스스로 변하려고 하지도 않고, 시대에 뒤떨어진 과거의 경험만 좇아 안주하려는 태도가 비효율성을 낳지는 않았을까 깊이 고민할 때이다.

과학기술 선진국인 독일에서도 2000년대 초 과학기술 발전이 정체되고 있다는 우려 속에 연구 혁신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당시 독일 정부는 4년 동안 범부처 협의체를 만들어 연구 현장의 소리를 들었고, 이를 토대로 ‘연구 자율성 극대화(새로운 아이디어를 위한 더 많은 자유)’로 정책 방향을 제시하여 계속 과학기술 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에, 우리 정부의 역할이 보이는 것 같다.

1965년에 발표된 만화가 이정문(82)의 '2000년대의 생활의 이모저모'.
1965년에 발표된 만화가 이정문(82)의 '2000년대의 생활의 이모저모'.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과학강연을 할 때 종종 보여주는 그림이 한 장 있다. 2015년 한국공학한림원 창립 20주년 행사 초청장의 표지로 선택되면서 다시 한 번 더 화제가 되었던 미래 만화 ‘서기 2000년대의 생활의 이모저모’이다. 1965년 당시 24세인 이정문 만화가가 한 학생잡지사의 요청으로 그린 그림이다. 미래학자들이 수십 년 뒤 미래 사회를 전망한 내용의 신문 기사를 참고했다지만, 인터넷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젊은 만화가의 상상으로 그린 그림이 6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오늘날 기술적으로 모두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정확한 예언이 되어버린 그의 상상력에 경탄(驚歎)해 마지않을 수 없다.

그림 속에 있는 태양열을 이용한 집, 전파신문, 움직이는 도로(무빙워크, moving walkway), 소형 TV전화기(스마트폰 화상전화기), 로봇청소기, 전기자동차, 액정 TV를 통한 부엌에서의 메뉴 검색, 집에서 공부하는 원격교육, 집에서 진료받는 원격진료는 물론이고 원격수술까지도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누리고 있는 기술들이다. 달나라 수학여행도 비용 문제가 숙제이긴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가능해졌다. 이것들을 가능하게 한 게 과학기술이고, 과학기술인들의 역할이다.

우리나라에서 컴퓨터는 보급되지도 않았고, 국산 냉장고가 나온 게 1965년, 흑백TV 생산이 1966년, 아폴로 11호가 최초로 인간의 달 착륙에 성공한 게 1969년이고 보면, 그의 그림은 단순한 공상만화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는 비전이고, 그는 이미 그 시대의 글로벌 리더였다. 어느 시대 어느 집단에서든 손에 쥔 칼을 휘두르는 데만 쓰는 게 아니라, 날을 벼려 그 집단이 나아갈 미래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진정한 리더로 인정받고 따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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