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현 논설위원, (주)터치포굿 대표

박미현 논설위원
박미현 논설위원

몰디브 스카우트 지도자 라시다는 2004년 스위스 알프스 산맥 중턱에 위치한 걸스카우트 국제센터에서 열린 리더십 세미나에서 만난 친구이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혼자 참여한 국제행사였고, 라시다는 내 첫 외국인 룸메이트였다.

일주일이라는 세미나 기간에 전 세계에서 온 참가자들은 제공되는 프로그램을 열심히 익히는 것과 동시에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가장 어린 참가자가 아프리카에서 온 15세, 가장 나이가 많은 참가자는 중년의 파키스탄 참가자였는데, 문화도 장래 희망도 달랐지만 문제는 없었다. 스카우팅이라는 국제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속감과, 각자의 자리에서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바뀌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스카우트 지도자로서의 기본 신념이 같았기 때문에 영어 실력과 상관없이 알고 있는 것을 최대한 나누는 시간이었다.

20년이 흘렀고, 각자의 삶을 꾸리며 자주 연락하진 못했어도 잊을 수 없는 인연은 틈틈이 기억에서 튀어나온다. 대학생이던 에린은 캐나다에 여행사를 차렸는데 작년에 서울을 방문하게 되어 같이 강남스타일 동상을 찾아가기도 하고, 아이슬란드에서 친환경 기업을 창업한 브라질 출신의 안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메신저로 폭풍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라시다가 새만금 잼버리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즐겁고 건강하게 잘 야영을 마치고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매일 잼버리의 문제에 대한 뉴스가 이어지고, 새만금에 있는 동안 인터넷이 원활하지 못해 연락이 잘 안 되다 보니 걱정을 하다가 서울에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나가 명동에서 만났다.

지난 주말 명동 한복판에서 얼싸안고 방방 뛰는 두 사람. 몰디브 스카우트 지도자 라시다와 나는 19년 만에 다시 만났다. 
지난 주말 명동 한복판에서 얼싸안고 방방 뛰는 두 사람. 몰디브 스카우트 지도자 라시다와 나는 19년 만에 다시 만났다. 

수십 명의 몰디브 청소년과 함께여서 어디 들어가 앉을 생각도 못 하고 길거리에서 수다 삼매경이 시작되었다. 안부로 시작해서 야영장에서 고생한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화제는 주로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청소년 참가자는 이 시간을 어떻게 기억할까에 대한 것이었다. 평균 15세 정도인 청소년들은 갑자기 주어진 쇼핑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지만 “이러려고 한국까지 온 건 아니었는데”라는 읊조림에 우리 둘 다 말을 잃었다. 4년에 한 번 열리기에 청소년기에 한 번 참여하기도 어려운 잼버리에 참여하는 기회를 얻고도 이것이 정말 그들에게도 잼버리로 기억되긴 할까?

K-pop콘서트는 언젠가부터 한국이 주최하는 큰 청소년 행사에서 빠지지 않는 존재이다. 물론 청소년 참가자가 학수고대하는 일정이지만, 진짜 잼버리의 꽃은 전 세계 참가자가 준비해 온 문화 프로그램을 나누는 국제문화의 밤이다. 잼버리 참가자는 짐을 쌀 때 가장 먼저 야영생활을 위한 침낭과 기본 생활도구를 챙기지만, 자신의 문화와 역사를 설명하기 위한 전통 의상과 음식, 악기를 빼먹지 않는다. 문화 교류를 통해 청소년은 내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해와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폭넓은 문화 감수성과 유연한 사고는 낯선 정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배경이 다른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경험을 통해 청소년은 다양한 경험에 용기를 갖고 자신을 노출시킨다. 청소년기의 풍부한 경험은 이토록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펼치도록 자신감을 준다.

태풍으로 모두 철수하고 중간에 전국으로, 국가별로 흩어지는 바람에 이번 잼버리 참가자는 제대로 된 국제 교류를 경험하지도 못했다. 더운 새만금에서 짬짬이 연습하던 전통 춤과 노래들은 자기들끼리의 그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했다. 그 누구의 삶에도 영감을 주지 못했다.

언론에서 농담으로 이야기하는 ‘여행하는 잼버리’, ‘전국을 누비는 잼버리’라는 것이 과연 스카우트 참가자에게 도움이 되는 추억일까?

이 사진 속 우리의 반가운 모습은 요즘말로 "찐"이다. 찍힌 줄도 몰랐던 사진을 전해 준 사람은 사태 수습을 위해 동원된 기업 소속 자원봉사자로, 그간 근엄한 지도자의 모습만 보다가 순식간에 명동 한가운데서 소녀처럼 팔짝팔짝 뛰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해서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잼버리에 참가한 스카우트 단원들은 나라마다 서로 다른 항건(스카우트의 상징인 삼각 스커프)의 색깔을 눈에 아로새기며 헤어질 때 왼손 악수를 한다. 심장과 가까운 손을 맞잡고 마음을 담아 작별하면서 "곧 다시 만나, 세계 어딘가에서(See you soon, anywhere on earth)"라고 재회를 기약한다. 이번에 잼버리에 참여한 청소년들이 20년 후 어느 낯선 곳에서 끌어안을 친구를 만들 기회를 빼앗은 것, 그것은 K-POP 콘서트로도,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큰 손실이며 잘못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