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식 논설위원, 전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논설위원
이동식 논설위원

우리나라 동남해안 울산시와 마주보는 일본 해안에 하기(萩)라는 도시가 있다. 인구 5만 남짓의 그리 크지 않은 이 도시는 작아서 우리가 잘 모르는 곳이지만 일본의 근대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일본을 근대국가로 이끈 메이지(明治)유신(維新)이 이곳에서 발원했기 때문이다.

1866년 사쓰마번(薩摩藩)의 지도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조슈번(長州藩)의 지도자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동맹을 맺어 도쿠가와(德川) 막부를 타도하기로 하고 이듬해 11월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진군한다. 이들이 황궁을 점령하고 메이지(明治) 천황을 내세워 1868년 1월 신정부를 출범시키니 이것이 메이지유신의 시발이다.

이 과정의 중심인물인 기도 다카요시(1833~1877)가 바로 하기 출신이다. 그는 젊을 때에 하기에 있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라는 사설 학당에 들어가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가르침을 받았다. 기도 외에도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야마가타 아리토모(山形有朋),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을 이끈 주요 지도자들이 대거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을 받았기에 이곳은 유신을 탄생시킨 학당이고, 그 옆에 세워진 비석의 글씨대로 ‘메이지유신의 태동지’인 것이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쇼카손주쿠(松下村塾).
'메이지유신 태동지' 비석.
'메이지유신 태동지' 비석.

요시다 쇼인이 제자들을 가르친 쇼카손주쿠라는 학당은 자그마한 단층 목재 기와집이어서 단촐하달까 초라해 보인다. 강의실은 일본 다다미 8장을 깐 작은 공간인데 벽면에는 이곳 출신의 중요한 지도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이곳에서 28세 쇼인은 1857년부터 동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작했다. 메이지유신 11년 전이다.

쇼카손주쿠의 강의실.
쇼카손주쿠의 강의실.

필자는 1983년 8월에 처음 해외 취재 때 이곳을 본 적이 있는데 40년 만인 지난 6월에 이 학당을 다시 가 보았다. 그동안 일본의 메이지 유신도 조금 더 공부를 한 뒤라 특별한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 작은 공간에서 요시다 쇼인은 젊은이들을 가르쳤고 그 젊은이들은 일본을 바꾸어 강국이 되었는가? 어떻게 일본은 저 방대한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단기간에 습득하고 이를 자신들의 자산으로 소화해 내었는가?” 그 문제의 핵심에 요시다 쇼인이 있었다.

 쇼카손주쿠학당에서 배출된 메이지 유신의 주요 인물들.
 쇼카손주쿠학당에서 배출된 메이지 유신의 주요 인물들.

1853년 7월 미국의 페리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군함들이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자 그때까지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검은 군함(흑선)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다. 어떻게 그렇게 큰 배가 만들어졌고, 거기에 그렇게 큰 대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흑선을 보려고 해안가의 비탈진 언덕에 줄지어 늘어선 군중 사이에 한 시골 무사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요시다 쇼인이었다. 그는 이 거대한 문명을 만들어 낸 서양을 직접 가봐야 한다는 생각에 조그만 어선을 훔쳐 타고 군함에 오르지만 페리로부터 '정중하게' 추방되어 곧바로 고향에서 수감된다.

  요시다 쇼인(1830~1859)의 초상화.
  요시다 쇼인(1830~1859)의 초상화.

쇼인은 수감, 가택 연금 등의 상태에서도 서구문명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는 기개를 이 학당에 모여든 젊은이들에게 전수했다. “학문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시대를 알고, 나라를 위해 도움이 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쇼인은 이런 생각으로 학당에서 3년이 안 되는 시간동안 백여 명의 제자를 키우다가 사형당했다. 그는 스스로 공부한 세계정세와 다양한 학문을 바탕으로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문제를 생각하고 풀어가는 방식으로 미래를 헤쳐갈 정신과 지혜를 길러주었다. 쇼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일본의 청년들은 곧바로 유럽과 미국으로 간다. 쇼인의 문하생 중 5명은 이미 1863년에 밀출국해서 영국에 유학하고 있었다. 이들이 어떤 마음가짐이었나? 1860년 이후 6년 동안에 세 번이나 서양을 다녀와 일본의 근대를 일으킨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그의 글에서 밝힌다....

우리들은 병원, 빈민구조소, 맹아원, 정신병원, 박물관, 박람회 등을 눈으로 보고 신기해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그 유래와 그 효용을 듣고 심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조선 사람이 처음 일본에 와서 보는 것마다 듣는 것마다 놀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선사람은 단지 놀라기만 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많지만 당시 우리 일본인은 놀라는 데만 그치지 않고 몹시 부러워하며 그것을 우리 일본국에도 실행하려는 야심을 단단히 굳혔던 것이다. ......‘후쿠자와 전집’ 서언

바로 그 차이였다. 조선은 놀라기만 하고는 끝인데 일본인들은 놀라운 것을 배워서 자신들의 것으로 했다. 일본은 페리 제독 함대의 방문을 서양문물을 따라잡는 계기로 삼아 성공했지만, 조선은 12년 뒤인 1866년 강화도에 온 프랑스 함대를 상대로 이름뿐인 승리를 거둔 다음 더욱 문을 닫아 걸었다. 서양을 재빨리 배운 일본은 불과 10년 후인 1874년 타이완을 침공하고 1년 뒤인 1875년에는 군함 운요호(雲揚號)를 강화해협에 불법으로 보내어 무력으로 조선을 굴복시켰다.

그 뒤의 역사는 너무도 잘 아는 그대로이다. 조선은 일본의 군화에 밟히며 치욕의 반세기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적극적으로 서양을 배운 일본과, 서양에 대한 무책임한 우월감으로 버티다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자초한 우리, 그 뒤에는 이같은 국민의식과 의욕의 차이가 있었음을 이곳 하기의 학당에 와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일본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요시다 쇼인의 기본 취지는 옳았지만, 그것이 아시아 각국에 대한 침략으로 이어졌기에 그의 교육 방향은 큰 비판을 받는다. 국력을 길러 조선과 만주, 지나를 정복하자고 외친 그의 사상은 대단히 위험하고 잘못된 야심이었다. 그러나 밀려드는 외세 속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를 세우려고 목숨을 걸고 도전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든 당시 일본의 젊은이들의 기개는 지금 봐서도 부러운 점이 없지 않다.

​우리가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난 지 내일로 78년이다. 그동안 우리는 국력이 엄청 커졌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다.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들은 일본을 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것은 근대의 일본 청년들보다 더한 노력이었을 것이기에 이에 대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는 지향점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의 풍요함만 추구하다가 삶의 가치를 잃어버렸고,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도 사라졌고, 모두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듯한 상황이다. 아득한 과거의 일본을 여전히 비난하는 것으로 도덕적 우위를 위장하고는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과 이권을 추구하는 데로 매진하는 철저한 개미들로 변한 것 같다.

대형 사고가 나도 하나도 개선이 안 되는 것은, 과거 일본인들이 놀리던 바로 그 모습에 다름 아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젊은이들은 세상을 배우고 일을 하기 위해 해외에 나가서 밤을 새워 일하고 공부했다면 이제는 너도 나도 먹고 놀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것 같다. 커지는 경제적 사회적 격차, 오로지 돈을 많이 벌고 잘 쓰는 것만을 최우선으로 전하는 대중매체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황폐함이 ‘무차별 살인’ 같은 잘못된 보복심리를 유발하는 것은 아닌가?

​요시다 쇼인은 감옥에 있을 때에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는 몸은 죽지만 혼이 살아있는 사람이 있고, 몸은 살아있지만 혼이 죽은 사람도 있다. 혼이 죽은 사람은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다. 죽고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시 광복절을 지나면서 우리나라의 갈 길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맞는 길인가?

너무나 급격히 변한 세상에서, 경제적 풍요로움 속에 우리의 삶의 지향점을 잊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사회의 건강함을 지키고 삶의 가치를 찾아갈 수 있는지 그것을 확립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삶의 규범을 지키며 인간다운 삶을 이어오고 있는지를 현재나 과거에서 다시 보고, 그런 비전이 있는 지도자와 함께 우리의 갈 길을 모색해야 할 것 같다.

1945년에 정치적 독립을 찾은 제1의 광복절, 경제의 어려움을 돌파한 제2의 광복절에 이어, 이제는 모두의 삶의 방법을 찾는 제3의 광복절이 필요한 때라 생각된다. 일본 시골의 한 작은 학당은 현재의 우리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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