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슬아 논설위원, 작가·컨텐츠 기획자

송하슬아 논설위원
송하슬아 논설위원

얼마 전 휴식이 간절해서 오후 반차를 결정했다. 쌓인 피로감을 풀기 위해 딱 반나절 정도만 이메일과 카카오톡, 메시지, 전화로부터 의도적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막상 당일이 되니 4시간 동안 카페에 가거나, 서점에 가기, 친구네 집에 놀러 가기 등 하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지만, 이런 유혹을 떨쳐내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디지털 디톡스(스마트폰, 노트북의 사용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를 실천하려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동네 우체국을 지날 때쯤, 불현듯 잊었던 등기서류가 생각나 갑자기 버스에서 내리게 됐다.

등기 우편물은 꼭 수취인이 받아야 되는데, 직접 받지 못하면 우편물 도착 안내 스티커를 현관에 붙여준다. 집배원이 재방문했을 때도 수취인이 없으면 당사자가 우체국으로 찾아가는 방식이다. 평일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반드시 본인이 찾으러 가야 한다는 점이 다소 번거로웠는데, 오늘이 딱 기회라 생각했다. 우체국 앞에서 전화 문의를 해보니 이미 내 서류는 금천 우체국을 벗어났고, 여기서 1시간가량 떨어진 서울 구로우체국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고객님, 그럼 오늘 찾아가실 건가요?”

수많은 택배와 카드결제 알림 속에서 한 번도 읽은 적 없었던 등기우편 발송 알림. 웬만한 정보는 스마트폰 알람으로 다 보내주는 T은행사는 왜, 어떤 이유로 나에게 이 서류를 보낸 것인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네, 갈게요. 1시간 뒤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소통 알람은 잠시 껐고, 스마트폰 지도 앱을 켰다. 그렇게 반나절 여행이 시작됐다. 평소에는 A버스를 타고 곧장 직진하면 우리 집에 갈 수 있는데 오늘은 B버스로 갈아타고 동네를 크게 벗어났다. 그다음 지하철 7호선으로 갈아탔는데, 한산한 좌석에 앉으니 에어컨의 차디찬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평소 출퇴근 길이었다면 절대 느끼지 못할 쾌청한 실내 온도였다. 그때 이미 5000보 걸음을 쌓았다는 스마트 워치의 알람이 울렸다. 평소에는 사무실에 앉아 있느라 2000보도 못 걷는 시간대인데.

천왕역 계단 위에 오르자 탁 트인 사거리 가로수 풍경이 펼쳐졌다. 초록 나무가 쭉쭉 뻗어 있고 매미 소리로 가득 찬 맑은 날, 앳된 여중생들이 종알종알 까르륵거리는 모습이 몹시 생경했다. 평일 낮, 잠시 옆 동네로 왔을 뿐인데 서울 풍경이 이다지도 다르게 보일 수 있다니.

여름은 여름인지라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났다. 서울 구로우체국에 도착했을 때 대형 선풍기와 가장 처음으로 마주쳤다. 정수기에서 물을 한 컵 떠다 마신 뒤, 선풍기 앞에 서서 잠시 더위를 식혔다. 낯선 도시에 혼자 놀러 온 느낌이 들었다. 우편 취급 관련 접수대에 서자 볼 일은 2분도 안 되어 끝났다.

T은행사는 왜, 어떤 이유로 나에게 종이로 고지문을 보내온 것인지 궁금증을 다시 상기했다. 호기심 반으로 우편물을 열었을 때 간담이 서늘해졌다. T은행사가 경찰에 나의 거래내역과 인적사항을 제공했으며, 정보가 수사 목적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을 서면으로 통보한다는 내용의 ‘금융거래 정보제공 사실 통보서’였다. 순간 내가 어떤 범죄에 연루된 상황인 것인지 나도 모르는 새에 금전 피해를 당했는지 찜찜해졌다. 무엇보다 T은행사는 문자로 충분히 이 내용을 알릴 수 있었으면서 왜 종이 값, 우편요금, 나의 시간을 쓰게 만든 등기우편 방식으로 이토록 비효율적이어야 했을까? 의문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필히 여행하게 하려는 속셈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어쨌거나 오후 반차를 썼음에도 퇴근 시간보다 더 늦게 집에 도착했다. 궁금해서 낯선 동네에 다녀온 경험이 어떤 독자에게는 이렇게 무더운 날, 쓸데없는 짓을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박하경 여행기’의 이나영(극 중 박하경 역)이 이런 심경이었을 것 같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박하경은 빡센 일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는데,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나 뜻밖의 일들을 경험한다. 그런 내용의 에피소드 8개를 정주행한(어떤 작품을 처음부터 죽 시청한다는 의미) 지 얼마 안 된 시기라 등기 우편을 핑계로 ‘나도 못할 거 없지’ 모방 심리에서 비롯된 작은 일탈이었다.

그날은 정말 오랜만에 땀을 많이 흘렸는데 지친 것보다는 헛웃음도 나왔다.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우편물 하나를 찾으려 일상을 벗어나게 했고, 마치 내가 한 편의 ‘박하경 여행기’ 분량을 채운 것마냥 만족스러웠다. 그런 식으로 나는 강원도 원주, 안국역 등 7월 한 달에 4번의 짧은 여행을 마쳤다.

‘나는 여전히 여행이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단히 재미있지도 의미 있지도 않다. 특별한 목적도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간혹 어떤 순간을 실감하는 게 다다. 그래서 즐겁다. 그러니까 사라지고 싶을 때는 어디든 가보자.’ –박하경 여행기 내레이션 중

시원한 곳으로 옮겨 더위를 피한다는 뜻의 ‘피서’는 올해 생각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 많이 걷고, 더 땀을 흘리는 짧은 여행을 여름이 끝날 때까지 즐길 것이다. 등기우편 서류 같은 걸 핑계 삼아 또 여행길을 나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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