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구 언론인,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석구 언론인
이석구 언론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이 협정으로 3년여 한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전쟁이 멈췄다. 그로부터 70년, 평화가 지속됐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휴전이란 사실을 잊은 것 같다. 사실은 전쟁을 중단한 휴전상태로 언제든 열전(熱戰)에 돌입할 수 있는데도-.

남북, 국내외 갈등과 대결도 심각하다. 북한의 핵무장은 나날이 고도화되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미사일을 쏴 댄다. 남북한 대화도 단절됐다. 북진통일과 대남적화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선에서 잦은 충돌을 벌이다 전면전이 된 1950년의 남북 대치상황과 유사하다. 미·중 대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신냉전으로 치닫는 국제 환경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과 진영대립도 폭발 직전이다. 내 편이 아니면 부정한다. 6.25 발발 책임을 놓고도 좌우가 대립할 정도다.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38도선을 넘어 전면적으로 침공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련의 스탈린 관련 기밀문서도 북한의 남침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좌파는 다르게 본다. “6.25는 내전이며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는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 석좌교수) 같은 수정주의 학자의 영향이 크다. 그는 “누가 먼저 총을 쐈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무의미한 질문”이라며 “해방 전부터 한국 사회에 쌓여 있던 계급갈등이 분출, 내전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전환시대의 논리’(이영희), ‘해방 전후사의 인식’(백기완, 송건호, 임헌영)과 더불어 운동권 좌파의 의식을 관통하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6.25 당시로 올라가 보자. 해방 당시 우리나라는 소작농이 70% 이상 됐다. 이들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나눠주는 1946년의 북한 토지개혁은 다수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 문맹이 다수인 당시 북한 사회는 공산주의의 실체를 몰랐다. 인간이 평등하게 잘 살게 해준다는 공산당의 선전선동에 현혹되기 쉬운 구조였다. 김일성 정권은 소련의 전폭적 지원 아래 촌 단위까지 인민위원회라는 세포조직을 만들어 발 빠르게 북한 사회를 장악, 공산당 통치를 확고히 했다. 그리고 분열된 남한의 적화통일을 꾀해 38도선을 넘었다.

반면 소련과 달리 미국은 9월 9일 뒤늦게 남한에 들어왔다. 남한 사회는 이때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박헌영의 남로당 등 좌파 연합이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적색농민조합 등 대중조직을 활용해 상당 지역에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치안과 행정권을 인수한 상황이었다. 인민위원회 관할 구역은 일종의 해방구였다. 존 하지 미 군정 사령관은 한국 점령 정책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미국은 신탁통치안을 내놓을 정도로 한국 상황에 무지했다. 미 군정은 처음에는 언론자유, 집회결사의 자유를 내세워 좌파들의 활동을 방관하는 등 갈팡질팡했다.

미 군정은 당초 이승만, 김구 등 임시정부 요원이나 김성수, 김규식 등 국내 우파 지도자를 내세워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도 없었다.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또 이승만 등 우파는 상부에 명망가만 있을 뿐 좌파의 노조,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같은 하부조직이 없었다. 우파는 전평을 통한 대대적 파업, 여순반란, 제주 4.3사건, 대구폭동 등 남한을 적화하기 위한 좌파의 공세에 취약했다. 그대로 두면 남한의 공산화는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미 군정은 중국 본토의 공산화, 소련 공산주의에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전평, 남로당 등 좌파단체를 불법화했다.

우여곡절 끝에 1948년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권이 수립됐지만 좌파는 여전히 강세를 보였다. 여수 순천 반란, 4.3 제주사건, 전국적 파업 등이 단적인 예다. 이승만 정권은 미 군정처럼 식민지 시절의 공무원과 경찰조직을 활용, 대중 조직력이 강한 좌파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친일파를 숙청한 북한과 대비됐다. 선전 선동에 능한 좌파에게 좋은 공격재료가 됐다. 남한이 1949년 토지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남로당 박헌영의 예상처럼 6.25 때 좌파의 봉기로 내부에서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선진 한국의 번영도 그때 사라졌을 것이다.

지금도 좌파들은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되는 부도덕한 정권’이라고 생각한다. 민노총, 시민단체 등 좌파와 민주당은 윤석열 정권을 ‘친일 매국, 전쟁동맹’ 정권으로 규정해 퇴진을 외친다. 주말이면 세종로는 합법적 정권의 퇴진 집회로 몸살을 앓는다. 해방 후 사분오열된 남한 사회의 혼란을 보는 것 같다. 정전협정으로 70년간 한반도에 총성이 멎다 보니 우리가 전쟁을 일시 중단 중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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