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데일리임팩트 주필

며칠 전 내가 속한 단톡방에 어떤 사람의 장모가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떴다. 단톡방은 단체 카톡방이라는 말인데, 이런 말도 잘 모르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 굳이 풀어서 설명한다. 하여간 부고가 올라오자마자 또 영락없이 예외없이 조문카톡이 줄을 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카톡, 카톡….

언제까지 그러나 하고 두고봤더니 오후 2시쯤에 시작된 “삼가…” 머시기행진은 밤 12시 넘어서까지 계속됐다. 나야 카톡이 와도 소리가 나지 않게 해놓은 지 오래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꽤나 소음공해에 시달렸을 것 같다. 나는 고인을 모르고, 상주도 그리 친숙한 사람이 아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단톡방의 천편일률적인 조문인사.
   어느 단톡방의 천편일률적인 조문인사.

그 단톡방은 소속된 인원이 100명 가깝고, 예전에 맡아서 하던 일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은 데다 80대부터 50대까지 나이 편차가 커서 평소에도 소통에 문제가 좀 있는 곳이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고인이나 상주를 알 리 없는 사람들까지 조문을 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입 달린 자들(이크, 그게 아니라 폰 가진 분들)은 다 한마디씩 하는 형국이었다. 국화 사진을 담은 조문영상을 띄우거나 학을 타고 신선이 되어 떠나간다는 ‘학가(鶴駕)’ 머시기를 유식하게 읊으면서 조의를 표하는 사람까지 아주 환장적(환상적 x)이었다. 더 환장적인 경우는 정작 상주가 그 단톡방에 있지도 않은데 다른 사람이 올린 부고를 보고 ‘조문질’을 해대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주로 평소에도 인생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이나 미담, 신기하거나 멋진 사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건강정보, 더러는 편향된 정치적 주장 따위를 잘 올리는 부류이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렇게 하는 게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일이요, 스스로 존재를 증명하는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를 자꾸 말하다 보면 성가셔서 ‘새복만’으로 줄이듯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도 ‘삼고빔’이라고 줄여서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가보다. 물론 대놓고 그렇게 장난처럼 조의를 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그 말을 줄여서 표기하는 약어다.

이 ‘삼고빔’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인터넷에는 ‘삼가’가 고인과 생전에 알던 사이일 때만 쓰는 말이냐는 질문이 올라온다. 평소 모르는 사이였으면 ‘삼가’를 붙이지 말고 그냥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만 해야 한다는데 그 말이 맞느냐는 질문이다. 어떻게 해서 생긴 속설인지 띄어쓰기를 하면 안 된다는 말도 있다.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이렇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카톡. 안되는 안 돼의 잘못.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말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카톡. 안되는 안 돼의 잘못.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쓸 때 마침표를 붙이지 않는 게 조문예절이라는 설도 나돈다. “명복을 빕니다.”는 고인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말인데, 마침표를 찍으면 문장을 닫고 길을 막는 게 되어 결례라는 것이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죽음은 영원한 쉼표,/남은 자들에겐 끝없는 물음표…”라는 김소엽의 시 '죽음은 마침표가 아닙니다'(1987년 발표) 때문이라고 한다. 이 작품이 회자되면서 그런 오해가 생긴 것 같다는 것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광고 멘트가 아이들에게 혼란을 일으킨 것과 비슷한 현상인 것 같다. 다 우스운 일이다.

장례식장에 가서 조문을 할 때 고인이 평소에 아는 분이라면 영정에 절을 하고 그런 경우가 아니면 그냥 목례만 하는 게 예법이라는 말도 있던데, 생판 알지도 못하던 사람의 죽음에 무슨 조의가 그렇게 진지하고 치열하단 말인가. '삼가'는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정중하게'라는 부사다. 동사는 삼가하다가 아니라 삼가다로 쓴다.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이고 시도 때도 없는 조문을 제발 좀 삼가주기를 삼가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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