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일 신구대 원예디자인과 교수

전정일 교수
전정일 교수

여름비가 거세게 내린 후 맑은 하늘이 잠시 드러난 틈을 타서 식물원을 걷고 있었다. 한동안 화려하게 정원을 빛내주던 백합이 꽃잎을 떨구기 시작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거센 여름비와 함께, 봄부터 초여름까지 화려한 꽃들의 시간이 막을 내리고 짙은 녹색으로 잎들의 시간이 깊어지게 될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꽃들은 그동안 할 일을 충실하게 해주었다. 식물원을 찾는 사람들의 눈과 코를 통해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꽃이 없는 정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소위 ‘볼거리’가 없다고 하면서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이런 실망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꽃잎을 떨구며 열매를 키우기 시작한 백합. 
 꽃잎을 떨구며 열매를 키우기 시작한 백합. 

꽃의 구조는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워서 알고 있듯이 밖에서부터 순서대로 꽃받침, 꽃잎, 수술, 암술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암술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위에서부터 암술머리, 암술대, 씨방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씨방 안에는 장차 씨앗으로 성숙할 밑씨가 들어있다. 그러니까 사람에 견주어보면, 씨방은 어머니의 자궁이며 그 안에서 ‘씨앗’이라는 아이가 자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밑씨가 씨앗이 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수술에 있는 꽃가루가 암술머리까지 옮아와야 한다. 많은 꽃은 ‘자가불화합성’을 가지고 있어 자기 꽃의 수술에서 꽃가루가 날라오면 수정이 되지 않는다. 즉, 다른 개체의 꽃에서 꽃가루가 옮아와야 한다.

꽃가루를 옮겨주는 방법 중에 바람이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 방법에 의존하는 식물은 바람이 꽃가루를 뚜렷한 목표 방향 없이 날려 보내기 때문에 성공률도 낮고, 꽃가루를 많이 만들어야만 하다 보니 비효율적이다.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이 곤충과 같은 동물을 매개자로 하는 것인데, 이때 꽃잎이 역할을 한다. 꽃잎이 꽃가루를 옮겨줄 일꾼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화려한 색과 무늬, 먹음직한 꿀과 향기로 꽃가루를 날라줄 곤충들을 열심히 불러준다.

이렇게 꽃가루 매개자가 ‘수분(受粉)’을 해준 후에, 꽃가루에 들어있던 유전자가 씨방 안에 있는 밑씨까지 전달되어 ‘수정’이 되면 비로소 씨앗이 잉태되는 것이다. 이제 꽃은 더 이상 화려한 꽃잎으로 곤충을 부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꽃은 필요가 없어진 꽃잎을 떨군다. 수술도 더 이상 필요 없다. 이제는 씨앗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시간이다.

뱃속에서 아이가 커감에 따라 어머니의 배가 불러 오르듯이 씨앗이 커감에 따라 씨방도 커진다. 이렇게 커진 씨방이 곧 ‘열매’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꽃잎을 떨구어야 비로소 열매가 맺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꽃잎은 씨앗과 열매를 키우기 위해 역할을 다하고 사그라든 것이지만, 화려했던 꽃잎을 버려야만 더 중요한 열매가 맺는 것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많은 일을 함께하면서 깊게 정들었던 존경하는 선배 교수님이 떠오른다. 그분이 휴대전화 메신저 ‘상태 메시지’로 쓰고 있는 짧은 한 문장,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 그분은 아주 오랫동안 그 ‘상태 메시지’를 바꾸지 않고 지금도 그대로 쓰고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꽃잎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가 되겠지만, 그냥 그대로가 좋다.

그 선배님은 정년이 보장된 ‘화려했던’ 교수 생활을 일찍 접고 다른 일을 시작했다. 꽃잎을 버리고 더 중요한 ‘열매’를 맺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튼실한 열매를 맺기를 기원한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 묻는다. 나는 꽃잎을 버릴 수 있을까, 꽃잎을 버릴 만한 인생의 목표가 있는가. <다음 글은 8월 3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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