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슬아 논설위원, 작가·컨텐츠 기획자

송하슬아 논설위원
송하슬아 논설위원

모든 가정마다 집 전화기를 두고 살았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따르릉~’ 한 통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아빠를 따라 옷 가방을 챙겼다. 시골 큰집에 계신 할아버지가 지금 위독하시다는 연락이었다. 몇 시간 뒤 도착한 시골집에 흩어져 살던 가족 친척이 하나둘 모였고, 할아버지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다 같이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이 됐을 때 할아버지는 이미 숨을 거두신 상태였다. 딱딱하게 몸이 굳은 할아버지는 눈을 뜬 채 누워 계신 모습으로 어린 나와 마주쳤다. 누군가가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할아버지를 바라보셨고 보드라운 손으로 할아버지의 눈을 스르르 감겨 드렸다. 그제야 할아버지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할아버지의 그날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정작 나는 그때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보다 장례 기간을 고되게 만들었던 장대비를 유독 잊지 못했다. 축축한 저기압 날씨가 지속되는 7월이 되면 꼭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생각난다. 비가 심하게 내리던 장례 기간, 할아버지를 모신 관은 손님방에 두고, 큰집 마당은 김장 천막같이 빨갛고 파란 천막으로 채워졌다. 동네에서 찾아오는 조문객들에게 음식을 만들고 대접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온 마을 사람들은 궂은 날씨에도 안에서 한참 머물다 갔다.

하루 종일 비만 내리고 가족들이 정신없이 방문객을 맞을 때, 나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손에 든 우산을 던져버렸다. 비를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맞으면서 물웅덩이에서 첨벙첨벙 놀기 시작했다. 억수같이 쏟아부었던 그날의 비만큼 더 심한 장마는 또 없었는데, 그때는 우리나라 사계절이 뚜렷했던 20여 년 전 여름이었다.

어느새 국지성 호우라던가 폭우 같은 단어가 기상 예보에 자주 들리고, 여름비의 강도가 더욱 세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기상청에 의하면 최근 10년 중 2020년과 2013년에 정말 많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 6월 25일부터 7월 14일까지 400mm 넘는 비가 왔고, 누적 강수량의 평년값을 이미 뛰어넘었다고도 한다.

할아버지 장례식 날에 우산을 던졌던 아이는 훌쩍 컸지만, 우산을 다룰 줄 모르는 어른이 됐다. 이상하리만큼 매년 우산을 망가트리고 있다. 올해 벌써 우산을 2개나 버렸다. 비 오는 날 건물 사이 빌딩풍 구역만 지나가면 우산과 바람의 사투가 벌어진다. 우산을 한 손으로 들고 다니기가 어려울 정도다.

한 번은 작은 우산을 들고 나갔다가 우산이 홀라당 뒤집힌 적 있다. 그래서 큰 우산을 챙겨 같은 장소를 지났는데, 두 손으로 손잡이를 쥐었지만 바람에 휘청거리다가 두꺼운 우산대도 꺾여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여름만 되면 할아버지의 장례식만큼 퍼붓는 비와 버려지는 우산의 개수가 신경이 쓰인다.

지난 주말에 여름 장맛비가 휩쓸고 간 우리나라는 상처투성이가 됐다. 수재민이 속출하고 지반이 약해진 곳에선 산사태까지 발생해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자연재해로 인하여 의(衣), 식(食), 주(住) 중 하나라도 불편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여름철이 영 반갑지만은 않을 것 같다. 나조차도 우산을 또 부러트릴지 몰라 노심초사인데 하물며 물난리를 겪은 수재민이라면 여름에 긴장이 될 것 같다. 쏟아지는 폭우를 버티는 2020년대의 여름은 20년 뒤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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