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논설위원, 윤보선민주주의연구원 원장

김용호 논설위원
김용호 논설위원

2008년 가을, 미국발 금융위기 등으로 인해 민주당의 오바마 후보가 미 대선에서 승리하여 200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필자는 2009년 초에 미국의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입법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6개월 일정으로 뉴욕에 갔다. 그런데 1980년대 필자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시기와 2000년대 미국 정치가 너무나 달라져서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 충격은 미국 의회의 대명사인 자유투표(cross voting)가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당론 투표(partisan voting)가 일상화한 점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제안한 약칭 ‘경제회생법(American Economic Recovery and Reinvestment Act of 2009)’에 하원 공화당 의원은 1명도 찬성하지 않았다. 너무나 놀라워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한 결과 마찬가지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초당적으로 경제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 법안에 공화당이 주장하는 감세조항을 포함시켰다. 7870억 달러 중 약 25%에 해당하는 2000억 달러 이상이 감세를 위한 예산이었으나 하원에서 공화당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다. 다행히 민주당이 하원과 상원을 장악하고 있어서 법안은 통과되었다.

두 번째 충격은 더 심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서민들의 최대 숙원 사업이었던 의료보험제도의 도입을 시도하자, 이를 반대하는 '티 파티운동(Tea Party Movement)' 회원들의 난동이 벌어졌다. 티 파티는 2008년 미국 대선을 전후하여 등장하였는데, 공화당 지지자 중에서 특히 감세, 작은 정부 등을 추구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당연히 연방정부 차원의 의료보험제도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민주당 하원의원들이 2009년 8월의 의회 휴회기간에 자신들의 선거구 유권자들을 상대로 의료보험제도, 즉 오바마케어(Obamacare)를 설명하는 동네 주민모임(town hall meeting)에 티 파티 회원들이 뛰어들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모임이 중단되는 사태를 보고 경악하였다. 미국 정치가 이렇게 타락했나 싶을 정도였다.

필자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1980년대에는 이런 현상이 없었다. 미국 민주주의의 강점은 상대방의 의견에 반대하더라도 경청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출신 정치학자인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오래전에 미국의 타운홀 미팅을 참여 관찰한 후, 이것이 미국 시민사회의 강점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제 미국에서 이런 정치적 전통이 사라진 것을 보고 필자는 놀라웠다.

필자가 이런 현상을 ‘미국정치의 한국화(Koreanization of American Politics)’라고 농담했더니, 미국 정치학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국회에서는 오랫동안 당론투표를 당연시하고, 또 국회의원들마저 상대방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고함을 지르거나 소란을 피우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2009년에 미국 친구들에게 “그래도 미국 의회는 한국 국회처럼 육박전이 벌어지지 않고 있으니 아직은 나은 편”이라고 했더니, 미국 친구가 “곧 미국 의회에서 주먹을 날리는 경우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 후 미국정치는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지난번 미국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유권자들이 2021년 1월에 미국 의회의사당에 뛰어들어 난동을 부려 “미국 정치판에도 폭력이 등장할 것”이라는 그 친구의 예상이 적중하는 것을 보니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최근 한국과 미국에서 유사한 정치현상이 늘어나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의회의 양극화와 여야 간의 극한 대립으로 인한 입법 교착 상태의 증가, 거리의 정치 횡행 외에도 정당의 약화, 권력의 절제 부족 등이 비슷하다. 정당의 고유한 기능이 새로운 정치지도자를 육성하여 공직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인데, 양국의 정당들이 이런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국민의힘이 외부인사였던 윤석열 검찰총장을 어느 날 갑자기 대선 후보로 영입한 것은 당내에서 지도자 육성에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미국 공화당이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외부인사인 트럼프를 대선 후보로 선출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트럼프의 경우 권력의 절제가 부족하여 2020년 대선에 불복하고, 심지어 2021년에 의회의사당 난동을 부추기는 행동마저 했다. 한국의 경우 2020년 여야가 위성정당을 만들어 새로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말살한 것도 권력 절제의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훌륭한 민주주의제도를 도입하더라도 완벽한 제도가 없기 때문에, 그리고 법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없어서 빈틈이 있기 마련인데, 정치인들이 입법 취지를 살리는 권력의 절제가 없으면 민주제도도 유명무실해진다. 결국 제도에 못지않게 민주적 규범과 양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 미국의 민주주의는 똑같이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미국 민주주의는 200여 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시민민주주의로 발전해 나온 역사가 있으나, 한국 민주주의는 30여 년의 역사에 불과하고, 또 자유민주주의, 시민민주주의로 발전하지 못한 채 선거민주주의에 머물러 있다. 양국의 민주주의 역사를 비교해 보면 미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이 한국보다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한국 정치인과 유권자들이 대오각성하지 않으면 현행 민주주의가 언제 부서질지 모른다.

특히 최근 들어 부정선거 시비, 선관위의 채용 비리 등으로 인해 선거민주주의마저 흔들리고 있어 대단히 염려스럽다. 내년 총선이 9개월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선관위는 채용 비리 문제를 비롯한 내부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하고, 지금까지 나타난 선거 관리의 미비점을 충분히 보완하고, 선거 운동과 투·개표의 공정성을 확보하여 유권자의 신뢰를 회복하도록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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