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우현 논설위원, 한불협회 회장, 전 주 프랑스 공사 겸 문화원장, 전 숙명여대 객원교수

 

손우현 논설위원
손우현 논설위원

보수 우위의 미 연방대법원이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표적 정책인 학자금 대출 탕감 정책에 제동을 걸었다. 이외에도 대법원은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 대학들이 신입생 선발에서 소수인종을 우대해온 ‘어퍼머티브 액션(적극적 차별 시정조치, Affirmative action)’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와 같은 미 연방대법원의 잇단 보수적 판결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진영 간 이념 갈등을 고조시키고 양측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미 연방대법원은 바이든 행정부가 지난해 8월 내놓은 학자금 채무 면제 정책에 대해 미주리주 등 6개 주가 제기한 소송에서 6(보수) 대 3(진보)의 의견으로 연방정부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보수 초다수(conservative supermajority)’ 대법원의 이념 구도를 고스란히 반영했다. 보수 성향의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대표 집필한 다수 의견을 통해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정책을 미국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통해 시행할 권한이 없다”며 “시행 전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판시했다. 한편 진보 성향의 대법관 3명은 보수 성향 대법관들의 판결이 ‘정치적인 결정(political decisions)’이라고 비판했다.

이 정책은 연간 소득액 12만 5000달러(약 1억6450만 원) 미만의 소득자에게 학자금 대출을 최대 2만 달러(약 2650만 원)까지 면제해 주는 내용으로,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고학력·2030 유권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내세웠던 ‘1인당 1만 달러’ 탕감 공약의 연장선이다. 의회 승인이 필요 없는 행정명령의 형태로 추진됐는데, 4000억 달러(약 527조 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이라는 추산이 나오자 작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행정부가 과도한 돈을 마음대로 푼다”며 공화당의 비판이 거셌다. 이번 소송을 제기한 6개 주 중 하나인 아이오와주의 브레나 버드 법무장관은 미 CBS방송과의 회견에서 “대학 진학을 포기한 사람들이 대졸자의 대출을 갚아 준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번 대법 판결로 자신의 주요 공약이 무산돼 버린 바이든 대통령은 대법원이 헌법을 잘못 해석했다고 주장하면서 공화당이 “희망을 앗아갔다(snatched away the hope)”고 맹비난했다. 그는 대출자들을 돕기 위해 새로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NYT는 이번 판결이 “빚더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돕겠다고 대출자들에게 맹세했던 바이든 대통령에겐 엄청난 좌절이자 정치적 타격”이라고 평가했다.

미 연방대법원은 이번 회기를 마치면서 이외에도 보수적 가치가 투영된 판단을 연이어 내놓았다. 지난달 29일에는 지난 60년간 대학들이 교육의 ‘다양성’을 위해 흑인 등 소수인종을 우대해온 이른바 ‘적극적 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이 기준은 현재 정부와 기업의 채용에도 적용되고 있어 이번 결정은 미국 사회 전반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칠 ‘획기적인 판결(landmark ruling)’로 불리고 있다 .

바이든 대통령은 이 판결에 대한 기자의 질문을 받고 “진실은 우리 모두가 알듯이 미국에 아직도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The truth is, we all know it, discrimination still exists in America)“라고 하면서 “이는 정상적인 대법원이 아니다(This is not a normal court)”라고 질타했다.

반대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미국을 위해 훌륭한 날”이라며 “우리는 완전히 능력에 기반을 둔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며 이게 옳은 길”이라고 연방대법원 결정을 지지했다.

이밖에 연방대법원은 30일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동성 커플의 결혼 웹사이트 디자인을 거부한 콜로라도의 그래픽 디자이너를 지지하는 판결을 내놨다. 공공 사업장에서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한 차별 금지를 규정한 주(州)법과,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 중 어떤 것이 우선하냐가 쟁점이었다. 이 판결도 보수 성향의 6명 대법관 모두 업자가 동성 커플에 대한 서비스 제공 여부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 역시 공화당에 유리한 결정이다

보수 성향의 닐 고서치 대법관은 다수 의견에서 “수정헌법 1조는 모든 사람이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미국을 그린다”고 밝혔다. 이에 반해 진보 성향의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반대의견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인 대상 사업체가 보호 계층에 대한 서비스 제공을 거절할 수 있는 헌법적 권리가 부여됐다”며 비판했다.

이에 앞서 대법원은 흑인 유권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선거구를 나눈 주(州)들의 결정에 제동을 거는 판결을 내놨었다. 이는 보수 대법관들이 기존 이념 구도를 탈피해 진보 판사들과 의견을 함께하는 이례적 판결이라 이목이 집중됐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대형 사건에서 보수 결론을 내리기 위해 일시적으로 눈속임을 한 것”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미 정치 매체 '폴리티코'는 “민주당 내 강성 세력이 대법관 정원 확대, 종신제인 대법관의 임기제 전환 등 ‘대법원 개혁’ 필요성을 본격 제기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대법원의 잇따른 보수 판결에 위기를 느낀 민주당 지지층이 결집해 내년 대선에서 바이든에게 ‘호재’가 될 수도 있다고 NYT는 논평했다. 공화당 일각에선 “취약 지지층인 흑인·히스패닉의 지지율이 더 떨어질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다.

현재 9명의 연방 대법관 중 6명이 보수, 3명이 진보 성향으로 분류된다. 미 연방 대법원이 압도적 보수로 기울게 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재임기간 중 3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을 임명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지난번 대선을 앞두고 87세를 일기로 사망한 ‘진보의 아이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 임명이 차기 대통령 몫이라고 주장한 민주당과 공화당 일각의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골수 보수주의자인 에이미 코니 배럿(48,,여) 제7연방 항소법원 판사의 대법관 임명을 속전속결로 강행했다. 대법관 선출은 미국 대통령이 행사하는 가장 중요한 인사 결정 중의 하나로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남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미국 연방대법원은 ‘사법적극주의 (judicial activism)’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는 판사가 법을 해석하고 판결을 내릴 때 특정 결과를 염두에 두어 판사 개인의 정치적 목표 달성을 꾀하는 것을 말하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미국 대법관의 위헌 결정이다. 판례가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미국에서 위헌결정은 법을 제정하는 것과 같은 효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1년 연방 판사 후보들을 처음 지명하면서 “판사의 역할은 법을 해석하는 것이지 입법하는 것이 아니다.(The role of a judge is to interpret the law, not to legislate from the bench.)”라고 강조한 적이 있다.

트럼프의 정치 유산인 ‘보수 초다수' 연방대법원이 내년 대선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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