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학중 논설위원, 가정경영연구소장,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강학중 논설위원

연구소라고 해도, 풍광이 좋지도 않은 사무실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사람들은 별장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연구소를 양평으로 옮긴 지 8년이 되는데 아직도 연구소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 “놀러 가도 돼요?”, “차 한잔 주실래요?”, “궁금해서요.”, 한 번 정도면 그러려니 할 텐데 계절마다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차 한잔하자더니 식사 후에도 갈 생각을 안 하기도 하고. 용무가 있어 급히 나가려고 하는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손님 때문에 참으로 난처한 일도 있었다.

꽃이 좋아서, 단풍이 이뻐서, 근처에 잠깐 왔다가, 강원도 가는 길에... 다녀간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문득, 나에게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왜 적당히 사양하고 얼버무리고 웃어넘기지 못했는지.... 오겠다는 사람이나 오고 싶다는 사람을 어떻게 거절하느냐는 생각 때문에 인사로 건네는 요청까지, 내가 먼저 날 잡아서 연락하고 챙긴 죄로 마음고생을 좀 했었다. 정중하게 거절하거나 양해만 구했어도 부담스러운 뒤치다꺼리를 크게 줄일 수 있었을 텐데. 나처럼 본인이 거절 못 하고, 억울해하고 짜증 내고 화를 내면서 남을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딱 한 가지, 잘한 일도 있다. 술 한잔했는데 대리운전도 너무 비싸니 자고 가면 안 되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숙박 허가를 받질 못해 자는 건 안 된다고 웃으면서 선을 그었다. 어렵지 않았고 상대방도 더 이상 조르지 않았으며 인간관계에 금이 가는 일도 없었다.

회사의 대표이사로 근무했을 당시는 인사 청탁과 후원, 협찬 부탁이 많았다. 인사 청탁은 회사 방침이 워낙 확고했고 내 나름대로 원칙도 있었기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요즘에 거절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크고 작은 단체나 조직, 모임의 장을 맡아달라는 부탁이다. ‘가족’이라는 주제와 관련된 자리가 아니면 그 어떤 직책도 맡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지만 완벽하게 지키기는 쉽지 않았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뒤 통보하는 경우나 한사코 사양하는데도 손뼉 치고 만장일치라면서 밀어붙이는 경우는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분위기상 거절을 못 하고 어정쩡하게 받아놓고 끌탕했던 쓰라린 경험은 값진 교훈을 선물해 줬다. 내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고 원치 않는 자리는 처음부터 맡지 않는 게 좋다는.

세상 살면서 부탁을 거절할 수만은 없다. 부탁을 잘 못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나도 부탁을 할 일이 있고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며 사는 게 우리네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호구’가 된다거나 남의 눈치를 보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거절하면 이 관계가 깨지지나 않을까 불안해하며 끌려다니진 않는다.

내 경험으로 보아 평소에 몇 가지 원칙을 갖고 있으면 크게 고민하는 일을 줄일 수 있다. 법이나 규정을 어기는 부탁은 들어주면 안 된다. 들어줄 수 없는 게 아니라 들어주면 안 되는 부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을 정중하게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절교를 각오해도 좋다. 그런데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친한 친구 등, 가까운 사람이 그런 부탁을 할 때 함정에 빠지기 쉽다.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나 대단히 어려운 부탁이 있다. 그런 때에도 그 자리에서 딱 잘라 바로 거절하기보다 적당히 뜸을 들이는 것이 좋다. 즉답을 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부탁했을 가능성이 있고 부탁한 사람 역시 거절당할 마음의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빠른 결정을 기다리는 사안이라면 마냥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재촉 전화를 하게 내버려 두지 말고 빨리 대답해 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 다른 대책을 강구할 수 있다.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차선책이다. 그날은 안 되지만 다른 날은 가능하다, 이번 주까지는 안 되지만 다음 주까지는 해 보겠다, 천만 원은 불가능하지만 이백만 원 정도는 융통해 보겠다, 등등. 이번 부탁은 들어주면서 선을 긋는 것도 방법이다. 이번에는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다음에는 곤란하다고. 그런 얘기조차 안 하면 얼마나 어렵게 부탁을 들어줬는지 모른 채 또 다른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태도가 중요하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나에게 이런 부탁까지 했을까, 얼마나 어렵게 얘기를 꺼냈을까, 상대방 입장에 대해 공감해 주면서 따뜻하게 양해를 구한다면 설사 거절하더라도 관계가 깨지는 일은 막을 수 있다. 부탁을 못 들어주는 것일 뿐, 상대방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상기시키면서 가능하면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 결국 긍정적인 인간관계에 더 도움이 된다.

흔쾌히 들어주고 싶은 부탁도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얼마나 큰 복인지를 절감하는 경우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관계로 보아 이런 부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은 황당한 부탁이라면 거절해도 좋다. 부탁을 관철하는 게 목표인 사람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방 입장은 안중에도 없이 무례를 범하는 사람이라면 관계를 깨끗이 정리하는 게 좋다.

간간이 내가 관심 가질 만한 미끼를 던지면서 끈질기게 부탁하는 교활한 인간도 있다. 하지만 덥석 그 미끼를 물면 덫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부탁을 들어준 뒤, 마음 상하고 관계마저 꼬이는 일은 피해야 한다. 나의 부탁이 거절당했을 때의 기분을 떠올려 보고 예의를 갖춰 양해를 구했는데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더 이상 말려들지 말고 단호하게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 아니라 나도 또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하는 일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내가 부탁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사람을 나에게 소개했느냐”고 따지면서 신뢰에 치명적인 손상이 올 수 있고 그런 부탁은 내가 갚아야 할 빚이기 때문이다.

부탁을 내가 꼭 들어주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보자. 그 부탁을 내가 안 들어주면 큰일 날 것 같은 생각도 착각일 수 있다. 거절을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거절은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나를 지키는 지혜이자 용기이다. 모든 사람에게 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럴 필요도 없다. 착한 가면을 벗어던지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나의 가치관이나 소신에 따라 지혜롭게 거절하는 연습을 꾸준히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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