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구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석구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이석구 바른사회운동연합 자문위원

한국과 일본관계가 악화일로다. 양국 관계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지난달 11일 영국 콘월에서 열린 주요7국(G-7) 정상회의다.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양국 정상회담을 하지 않았다. 통상 이런 국제회의에 가면 다자간 회담과 별도로 양자 회담을 갖는 게 관례다.

양 정상은 소 닭 보듯 하며 회담 기간 내내 딴 나라 정상들만 만났다. 한 호텔에 3일간 함께 머무르면서도 가장 가까운 이웃은 외면했다. 악화된 관계 정상화 기대도 무산됐다. 이 같은 관계 악화는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서 그 근본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은 식민통치로 한국에 형언할 수 없는 심적 물적 피해를 주고도 진심이 담긴 사과를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한일 관계 악화는 한국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이웃이다. 지난 1965년 한국과 일본은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식민지시대를 청산, 국교를 정상화했다. 청구권 협정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라는 경제협력자금도 받았다. 아쉽게도 배상이 아니라, 청구권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배상문제는 두리뭉실하게 넘어갔다. 이는 두고두고 화근이 됐지만 그게 우리의 한계요, 현실이었다. 국제사회에서는 힘이 정의다. 힘과 이를 바탕으로 한 국제조약이 국제 질서를 규정한다.

이런 현실에 적응, 우리 살 길을 찾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한다. 그 힘에는 경제, 외교, 군사력이 모두 포함된다. 그러나 군사력은 우리의 선택 밖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4강국이 너무 세기 때문이다. 결국 경제가 뒷받침된 외교력으로 우리의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국가 간 조약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잘 맺어야 하고, 힘과 신의를 바탕으로 이를 지켜야 한다. “악법도 법”이란 말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통용되는 원칙이다. 물론 법을 무시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이 있을 때는 다르겠지만…

그런데 현 정부 들어 이런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법치라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여기서 국내 문제는 접어두고 한일 문제를 살펴보자. 현 정부 들어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 폐기, 한국 대법원의 신일철주금 징용자 배상 판결, 일본의 무역 보복, 위안부 피해보상 판결 등 일련의 사건으로 양국관계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박근혜 정부는 2015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한일 양국은 더 이상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소위 “최종적으로 불가역적으로 합의함”이라는 문구를 협정에 넣었다. 일본은 정부의 사과와 함께 10억 엔을 위안부 보상 기금으로 내놨다. 당시 야당을 비롯 시민단체, 여론은 대부분 이에 비판적이었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을 통해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사실상 이를 폐기했다. 일본이 제공한 기금으로 만든 재단도 해체했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는 분명 문제가 많다. 그러나 위안부 합의는 한국 정부가 을사늑약처럼 강제로 맺은 것이 아니다. 한국 정부의 무능을 탓할 수는 있을지언정 이를 일방적으로 무효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명박 정부 말기 때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한일 관계는 현 정부의 합의 파기로 더욱 꼬여갔다. 현 정부의 포퓰리즘적이고도 아마추어적인 정책이 자초한 것이다. 이어 2018년 10월 13일 대법원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당연히 일본은 강력히 반발했다. 일본은 청구권협정 2조(한일 양국은 양국과 양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를 근거로 모든 보상은 끝났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무역보복으로도 맞섰다. 강창일 주일 대사는 몇 달간 신임장도 제출하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이른바 사법농단 의혹도 이 같은 외교문제를 피하려는 박근혜 정부와 상고법원을 설치하려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협의에서 비롯됐다.

지난 1월 8일 서울중앙지법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위안부 배상소송에서 역시 원고 측 손을 들어줬다(고법에서는 원고 패소). 이는 한일 관계 악화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정부는 “사법부 판단에 정부가 간여할 수 없다”고 발을 빼고 있다. 그러나 이를 놓고 일본은 “청구권 협정으로 해결된 문제를 놓고 왜 또 문제를 제기하느냐”고 반발한다. 한국은 “국가 간 문제는 해결됐지만 개인의 청구권은 별개”라고 맞서고 있다. 양국 대법원의 법리 해석도 다르다. 박근혜 정부는 이를 감안, 사법부와의 공조를 통해 판결을 미루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는 위안부 합의는 파기하고, 징용자 배상문제는 사법부 판단이라며 뒤로 빠졌다.

박근혜 정부 때는 아베 신조 총리가 한일 관계 정상화를 위해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들은 척도 안 했다. 급기야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중재에 나서-사실상 압력-양국이 소위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을 현 정부가 폐기하고 반일을 외치니 인기는 치솟았다. 그러나 무역 보복 등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일본이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을 통제한다면 어떻게 될까? 삼성전자가 수입하는 메모리 반도체 제조 장비의 80%는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고 있다. 소재 부품 산업에서 아직 일본은 우리와 격차가 크다. 지난번 일본의 무역 보복에서 우리는 일본의 힘을 실감했다. IMF때도 미국과 일본의 힘이 어떤지 우리는 뼈저리게 느낀 바 있다.

일본을 두드리면 국민 지지도는 올라간다. 한국이 미국처럼 힘이 있으면 조약을 무시할 수도 있다. 강자는 협정을 다시 바꾸면 되니까. 그러나 한일 간 총체적 힘의 대결에서 우리는 아직 역부족이다. 현 정부는 뒤늦게 문제를 통감, 수습에 나서고 있지만 일본이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위안부 및 징용문제에 대한 해법을 갖고 오기 전에는 만나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번 G7회의에서 양국 정상회담이 불발된 것이 좋은 예다. 한국은 만나려 했지만, 일본이 고개를 돌렸다. 문 대통령이 스가를 찾아가 인사를 했는데도 그것으로 끝이었다. 일본이 한국의 취약점을 이용, 위안부나 징용배상 문제를 자기들 입맛대로 끝내려는 속셈이다.

한국은 이런 일본에 맞설 힘도 없으면서 “위안부 합의 파기, 국내 일본기업의 자산 압류” 등 강수를 썼다. 양국 정부가 합법적으로 맺은 위안부 합의 파기는 두고두고 한국 정부의 족쇄가 될 것이다. 징용자 배상 문제 등 법적 다툼이 있는 것도 일본의 동의가 없는 한 사실상 해법이 없다. 이는 국익을 고려하지 않은 이념 외교와 무지의 결과다. 식민통치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세대는 이제 일본 정치권에서 사라졌다. 일본은 언제나 때리면 된다는 망상은 버려야 한다. 냉철한 머리로 국익을 고려한 외교전을 펼쳐야 한다. 그것만이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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