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김민영 기자

[미디어SR 정혜원 기자]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 2016년 말부터 아버지인 조석래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 경영을 본격적으로 책임지면서 그룹의 지주사 체제 전환과 기반 구축을 안정적으로 마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그간 착실하게 준비해온 그룹 신사업이 ‘그린뉴딜’로 부스터(booster-보조 엔진)를 달아 주목받았다. 동시에 그룹 계열사의 ESG 등급이 전반적으로 상승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효성그룹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탄소섬유를 생산하는 것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탄소섬유는 철보다 4배 더 가볍고 10배 더 강해 ‘꿈의 소재'로 불리는데, 특히 일반 공기보다 수백배에 달하는 고압을 견뎌내야 하는 수소연료탱크 제작에 반드시 필요해 정부가 추진하는 수소 경제의 핵심 축으로 평가받는다.

효성은 탄소섬유 연구에 2007년부터 돌입했으며 3년 반만인 2011년 일본, 독일, 미국 등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탄소섬유의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이같은 성과는 조현준 회장이 아버지 조석래 명예회장이 중시했던 ‘기술경영’을 그룹 비전으로 이어갔기에 가능했다.

조현준은 창사 50주년이 되는 해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조석래 명예회장의 기술경영 철학을 이어받아 기존 주력산업 분야와 빅데이터를 중심으로 한 IT 솔루션 등 미래 성장동력 육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최근 조현준 회장은 아버지의 기술경영 철학을 이어가면서 친환경 소재 시장을 확대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대기오염의 주범인 일산화탄소를 원료로 하는 친환경 신소재 ‘폴리케톤’을 2013년 세계 최초로 상업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페트병을 활용한 친환경 섬유 브랜드인 리젠(regen®)을 출시하기도 하는 등 친환경 소재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같은 친환경 기술 개발에 앞장서는 등의 노력을 인정받아 최근 효성그룹 계열사의 ESG(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 등급이 전반적으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한국지배구조원 평가 기준).

1968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조현준은 보성중학교 졸업 후 미국 세인트폴 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다. 이어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일본 게이오대 법학대학원 정치학부에서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일본 미쯔비시상사와 미국 모건스탠리에서 근무하며 폭넓은 해외경험과 창의적인 마인드를 배웠다.

그가 경영 일선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으로 입사 후 1~2년 새 임원으로 연달아 승진해 8년 만인 2005년 효성 무역PG(퍼포먼스그룹 부문)장에 올랐다. 2007년에는 사장으로 승진해 효성 무역PG장과 섬유PG장을 겸직했다.

조현준은 영어, 일본어는 물론, 이탈리아어도 능숙하게 구사한다. 특히 정치, 문화,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아 미국과 일본, 중국 등 전세계 젊은 리더들과 깊은 친분을 쌓아온 것이 강점으로 평가받는다.

효성에서 무역PG장을 맡은 것도 뛰어난 어학실력과 해외 네트워크 등을 감안한 조치로 풀이된다. 효성그룹의 해외 현지투자를 앞두고서는 그가 직접 현지 고위관계자를 만나 투자 및 사업 협력방안을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효성의 한 관계자는 “조현준 (당시)사장이 미국, 중국, 러시아, 브라질, 동남아 등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광범위하게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조현준이 글로벌 인적 네트워크를 탄탄히 다진 데는 그의 스포츠 실력과 리더십도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계적인 명문 학교로 손꼽히는 미국 세인트폴 고교에서 동양인 최초로 야구팀 주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세인트폴) 입학 당시 영어가 유창하지 않아 처음엔 친구를 사귀는 데도 애를 먹었다”면서 “그러다 라이벌(학교)인 그로튼 스쿨과의 축구경기에서 (결승)골을 터뜨리고 나서부터 친구가 많이 생겼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학업뿐 아니라 스포츠 활동도 개인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로 통하고 있다. 스포츠를 팀워크, 스포츠맨십, 자기 절제, 인내심 등 미국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배울 수 있는 활동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가 세계 명문고교의 인맥을 활용하는 데는 이같은 스포츠맨으로서의 리더십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조현준은 야구, 아이스하키, 스쿼시, 테니스, 축구, 배구, 골프 등 구기종목을 다방면으로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아울러 고교에 이어 예일대 재학 시절에도 미식축구 대표선수로 활약한 바 있다. 그의 승부욕과 스포츠 사랑이 남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스포츠를 그룹 경영에도 적극 활용한다. 임직원들과의 격의 없는 소통을 위해 사내 체육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오고 있다. 그룹에 입사했을 당시 매주 일요일 효성 직장인 야구에 참가해 6년 연속 우승을 기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효성 관계자는 미디어SR에 “매년 그룹 차원에서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최근 조현준 회장이 직접 경기에 출전해 뛰기도 하는 등 임직원과의 격의없는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조석래

효성 명예회장이자 조현준 회장의 아버지. 2017년 7월 고령과 건강상의 문제로 일찌감치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맏이인 조현준에게 그룹 경영을 맡겼다. 조석래가 1981년 효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지 36년 만이다.

만우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는 작고하기 6년여 전인 1978년 사실상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3형제인 조석래-양래-욱래에게 각각 주력 기업을 맡겼다.

조석래 명예회장은 경남 함안군에서 1935년 태어나 올해 86세다. 일본 와세다대를 거쳐 미국 일리노이 공과대학원에서 화학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중, 56세의 나이에 홀로 동양나이론을 창업해 고군분투하던 선친(조홍제 창업주)의 부름을 받고 1966년부터 회사 경영에 동참했다.

이후 그는 나일론 원사사업을 세계 4위까지 육성시켰으며, 1973년에 동양폴리에스터를 설립하면서 효성을 명실상부한 화섬업계의 리더로 이끌었다.

조석래 명예회장은 1983년에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면서 효성 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대대적으로 손질하기도 했다. 이 선언 이후 효성 그룹은 화섬과 중전기, 화학, 건설, 정보통신 등의 사업에 집중해왔다.

그의 ‘선택과 집중’ 전략은 1997년 한국 기업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던 IMF 경제위기 때 빛을 발했다. 그룹 차원에서 섬유, 화학, 중공업, 정보통신, 무역 등의 사업을 제외한 비주력사업을 분류해 기존 사업과 통합하거나 매각했다.

그룹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만든 뒤 그는 글로벌 무대로 발을 넓혔다. 중국, 베트남 등에 스판덱스 생산 공장을 세웠다. 특히 베트남 공장은 세계 최대 공급 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2008년에는 터키, 2011년에는 브라질에 공장을 완공했다. 이로써 효성 그룹은 아시아를 비롯해, 유럽·중동·북아프리카부터 중남미 시장까지 전 세계 시장을 겨냥한 생산 네트워크를 확보하게 됐다.

사실 조석래 명예회장은 젊은 시절엔 기업인보다 대학 교수에 관심이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홍제 창업주도 그와 비슷하게 학구적인 성향으로 교수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는 학구적이며 논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유행에 편승하거나 의욕만을 앞세운 경영보다는 윤리적이고 원칙적인 경영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이따금 융통성이 없다거나 보수적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그의 학자적 소양은 경영에 발을 내딛은 초기에 크게 빛났다.

1974년 초 오일쇼크의 여파로 나일론 원자재가 품귀 현상을 빚었을 때, 조석래는 나일론의 원자재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그보다 더 구매가 쉬운 기초 원자재로 눈길을 돌려 원자재를 직접 생산한 것이다. 그의 광범위한 정보 획득과 주도면밀한 연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발상이었다.

조석래는 ‘기술 경영’에 집중해왔다. 그는 “아무도 안 할 때 (그 사업 영역에) 들어가라”, “오직 기술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지론을 펼쳤으며, 이는 사양산업으로 치부됐던 스판덱스 사업에서도 고수익을 얻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또한 효성은 타이어 보강재의 일종인 타이어코드로 세계 시장의 45%를 점유할 정도의 세계적인 기술력을 자랑하기도 한다. 2003년 중국에 생산 공장을 준공하면서 본격적으로 세계에 진출했으며, 미셸린과 굿이어 등 타이어 톱 메이커들과의 장기 공급계약도 체결해 세계 1위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

조석래는 “글로벌 경쟁력이 있는 분야에 역량을 집중해 효성을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면서 화학섬유 분야 연구개발 중심의 효성기술원에 추가로 기술원을 더 설립해 연구분야를 전문화시키기도 했으며, 한·미 재계회의와 한·일 경제인 회의, 태평양 경제협의회(PBEC) 등의 리더로서 국제 협력 증진에도 이바지한 바 있다.

 

조현상

효성그룹 총괄 사장. 조현준 효성 회장의 동생이자 조석래 명예회장의 자녀 중 막내다. 조현상은 효성그룹 오너 3세로 형 조현준 회장과 함께 형제경영을 해왔다. 부친의 뒤를 이어 효성그룹을 나눠 승계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 아버지, 송광자 경운박물관장이 어머니다.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이 작은아버지다. 조현식 한국테크놀로지그룹 부회장과 조현범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사장과는 사촌지간이다.

1971년 11월26일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의 셋째로, 경기초등학교와 청운중학교,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1994년 미국 브라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1996년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베인앤컴퍼니(Bain & Company)에 입사해 서울지사와 도쿄지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해, 사내에서 일본통으로 손꼽힌다.

2000년 아버지 조석래 회장의 부름을 받고 효성 구조조정TFT 경영혁신팀에 입사해 사내 컨설턴트로서 구조조정 자문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타이어코드와 스틸코드, 에어백용 원단 등 자동차용 소재사업과 관련한 다양한 인수합병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조현상 효성그룹 회장과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 조현상 삼형제 가운데 경제학을 전공한 것은 조현상이 유일하다.

사장으로 승진한 뒤 효성 산업자재PG장과 효성 화학PG 최고마케팅책임자(CMO), 전략본부장을 겸하다가 효성이 인적분할한 이후 총괄사장을 맡고 있다.

효성은 효성그룹의 주요 계열사로 주요 사업부문을 인적분할한 뒤 각 사업회사를 거느린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다국적 컨설팅기업인 베인앤컴퍼니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만큼 신사업 발굴과 인수합병 등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수합병에 회의적 시각을 지닌 경영진들은 물론이고 1년 넘게 피인수기업 경영진을 끈질기게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효성그룹 내에서 조현상을 두고 ‘협상에 능숙하다'는 평가도 나오는 이유다.

2007년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하는 ‘차세대 글로벌리더(YGL)’에 선정됐고 2009년에는 세계경제포럼 글로벌 아젠다위원회의 멤버로 아젠다 선정 작업에 참여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2010년 세계경제포럼 차세대 글로벌 리더의 주요 20개국(G20) 관련 조직인 ‘YGL G20 이니셔티브’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했다.

효성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들은 조현상은 경영 활동을 꼼꼼히 챙겨 세심한 경영 스타일을 보인다고 평가한다. 효성그룹의 대외활동도 주로 담당하고, 정이 많고 주변을 챙기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부터 효성나눔봉사단장을 맡아 그룹의 사회공헌활동도 주도하고 있다.

또한 조현준처럼 만능 스포츠맨이다. 어려서부터 야구, 수영, 축구 등 다양한 운동을 접했으며 초등학생 시절 전국 빙상 경기대회에 학교대표로 출전했고 브라운대학교 축구팀 선수로도 활약했다.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대학시절 브라운대학교 아카펠라그룹에 가입해 해외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이재용

삼성그룹의 차기 총수이자 브랜드가치 세계 5위의 삼성전자를 책임질 리더. 조현준과는 죽마고우다. 조현준은 지난 26일과 27일 두 차례나 고(故) 이건희 회장의 장례식장을 찾아 이재용을 위로했다.

조현준은 장례식장에서 취재진들에게 “어릴 적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놀면서 강아지를 예뻐하니 고인께서 강아지 2마리와 진돗개 2마리를 보내주셨다”면서 “가슴이 따뜻한 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68년생으로 동년배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조현준 효성 회장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조현준 회장이 직접 어린시절 한남동 자택에서 자주 교류했다고 장례식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아울러 두 사람은 일본 게이오대학 석사 과정을 함께 마쳤을 만큼 친분이 두텁고, 둘 다 야구를 좋아하는 공통분모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친분이 비즈니스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재용은 2014년 조현준의 소개로 스포츠브랜드 언더아머의 최고경영자(CEO)이자 창업주인 케빈 프랭크를 만나기도 했다. 당시 두 사람의 조우는 2017년 삼성전자가 출시한 웨어러블 신제품과 언더아머의 인기 앱의 연동 등의 파트너십으로 이어졌다.

이재용은 이건희 회장이 2014년 병상에 누운 뒤로 줄곧 삼성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왔다. 지난 25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별세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 능력은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른 가운데 책임은 더 막중해진 셈이다.

다만 이재용은 지난 6년여의 시간 동안 이미 총수 역할을 맡아온 터라 급작스러운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경영성과도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는 코로나19가 전세계로 확산한 상황에서 올해 1분기부터 3분기까지 지속적으로 실적을 개선해 주목받고 있다.

이재용의 경영 능력은 2016년 섬성전자의 미국 전장부품업체 하만을 인수한 것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증명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수 후 3년이 지난 2019년 말 하만 매출은 2017년 7조1026억 원에서 2019년 10조771억원으로 증가했다.

인수금액 80억달러의 ‘빅딜’로 삼성전자의 인수합병 사상 역대 최대 규모임에도 인수 합의를 발표한 지 약 4개월 만에 하만 주주들의 동의와 각국 당국의 승인을 모두 받아 절차를 마무리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이재용의 조용하고 차분한 경영 스타일이 반영됐다. 이재용은 미국 본사에서 하만 경영진과 직접 만나 인수협상을 담판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경영 행보에 있어 신중함이 엿보이며 실용주의를 원칙으로 움직인다.

특히 이재용은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정의선 현대차 회장과 함께 국내 글로벌 기업 간 ‘오픈 이노베이션’의 포문을 열었다. 지난 7월 삼성과 현대차 경영진이 만나 현대차의 남양연구소를 둘러보고 자율주행차와 수소-전기차도 시승하는 등 적극적 행보를 선보인 바 있다.

정의선 입장에서는 현대차의 미래 비전 등을 압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장소에서 자신의 지론을 폈고, 이재용은 재계 총수 가운데 처음으로 남양연구소의 문을 공식적으로 연 인사가 됐다.

이재용은 선친과는 달리 평소 의전도 선호하지 않아 출장 등의 해외 일정시 홀로 이동하는 소탈함으로 주목받기도 한다. 앞서 일을 마치고 아웃도어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홀로 기차역을 향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 이 부회장은 임원 전용기와 헬기를 매각했으며, 잔존했던 의전을 없애고 회사 안에서도 직원들과 같은 동선을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소탈함은 지난 5월의 ‘대국민 사과’라는 깜짝 발표에서도 드러난다. 이재용은 당시 대국민 사과를 통해 아버지만큼의 경영 능력을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자인한 뒤 ‘앞으로의 자신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4세 경영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또 삼성이 창업 초기부터 80년간 줄곧 고수해온 무노조경영 시대를 마감하겠다고 공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불법 경영 승계 의혹과 관련한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며 전적으로 이재용이 매듭지어야 한다. 또한 11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상속세의 재원도 마련해야 한다.

한편 미국 정부는 화웨이에 이어 중국 반도체기업 SMIC에 수출규제를 내리면서 불확실성이 더욱 짙어졌으며 최근 SK하이닉스는 10조원을 투자해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 인수를 결정하는 등 세계 반도체산업의 지각 변동이 진행 중이다. 지난 9월에는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가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자회사인 영국 반도체 개발 기업 ARM(암홀딩스)을 약 47조원(400억달러)에 인수하기도 했다.

미중간 무역갈등과 함께 초격차를 좁혀오는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한 ‘초격차 유지’도 이재용의 당면 과제로 꼽힌다. 이에 그는 “어려운 때일수록 미래를 위한 투자를 멈춰서는 안된다”는 선친의 뜻을 이어가면서 시스템 반도체(파운드리 및 칩설계) 글로벌 1위를 달성하겠다는 ‘반도체 비전 2030’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후 이재용은 은 중국 시안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찾은 것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회사 ASML 방문, 베트남 R&D센터 공사 현장 방문 등 전세계 현장을 꼼꼼히 살피면서 광폭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조현문

효성그룹 전 부사장이자 조석래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 그러나 2014년 효성그룹 계열사들을 고발하며 형인 조현준과 동생인 조현상을 대상으로 ‘형제의 난’을 일으켰다. 동시에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서 신해철과 함께 활동했던 독특한 이력도 있다.

조현문은 2017년 1월 싱가포르 현지에 ‘인헤리턴스 엔터프라이즈(Inheritance Enterprises)’라는 법인명의 사모펀드 법인을 설립해 운영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 회사 자본금은 5000만달러(약 597억원)로, 투자 및 벤처기업 육성 등을 목적으로 설립돼 조현문이 회사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현문은 2016년부터 행방이 묘연해졌었다. 대우조선해양비리를 수사하던 대검찰청 부패범죄특별수사단이 그와 박수환 뉴스커뮤니케이션스 대표를 ‘법률사무 대행’ 용역 계약을 맺은 의혹과 관련해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추적하면서다.

조현준 회장은 이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해 박수환 대표가 동생인 조현문과 결탁해 자신을 협박, 돈을 뜯어내려고 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또한 그는 박수환 대표가 조현문으로부터 홍보 자문의 대가로 최대 100억원의 성공 보수를 받기로 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당시 조현준 회장은 법정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 집안에서 생겼는지 참담하다”면서 “이제는 체념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현준 회장은 2017년 조현문을 공갈미수 혐의로 고발하는 데 이르렀으나 조현문의 소재지를 파악하지 못해 기소가 중지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현문은 그룹 경영에 참여하면서 그룹 내 비리가 만연한 것을 확인하고 2014년 효성그룹 계열사 대표들은 비롯해 친형인 조현준 등 8명을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서울중앙지법에 고발한 바 있다. 재벌 2세가 자신의 그룹과 가족의 비리를 고발한 전무후무한 사태로 거론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조현문이 조석래 회장에 반발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조석래 명예회장이 3형제 가운데 성과가 가장 좋은 사람에게 그룹을 물려주겠다는 의사를 밝힌 가운데 조현문이 맡은 중공업이 성과가 나빠져 후계구도에서 멀어지자 이에 불만을 품고 그룹과 가족을 상대로 소송전을 시작했다는 시각도 있다.

그가 제기한 소송으로 조현준 효성 회장은 지난해 9월 1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법정구속은 면했다. 조현문이 시작한 효성그룹 내 법적 공방은 ‘현재진행형’이다.

조현문은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한 것으로 유명하다. 1988년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하여 널리 알려진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대상을 수상했으며,  조현문은 ‘마왕’ 고(故) 신해철의 권유로 밴드 무한궤도의 신디사이저였다. 당시 조현문을 포함한 밴드 무한궤도 멤버들이 모두 명문대 재학생이라는 사실로도 대단한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조현문은 후에 신해철과 동석한 자리에서 “대상을 받고 나서 프로 음악인의 길에 대한 유혹이 있었으나 밴드를 계속 하기에는 자신의 실력이 부족해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했다”면서 가수 활동을 그만둔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 조현문은 기업인이 되기 위해 서울대 졸업 후 서울대 경영대학원에 입학했지만 1학기만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1998년 하버드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효성 경영전략 2팀장으로 입사하기 전까지 미국 뉴욕주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세인트폴고등학교(St. Paul’s School)

미국을 넘어 세계를 주름잡는 정‧재계 거물을 다수 배출한 세계적인 명문 고등학교. 조현준은 이 학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2008년에 이 학교 이사로 활동하면서 이사로 활동할 당시 매년 20만 달러씩 모두 100만 달러를 학교에 기부하기도 했다.

조현준과 함께 이 학교 재단의 이사회를 구성했던 멤버는 화려하다. 투자은행 바클레이즈 대표를 역임했던 아키발드 콕스 2세(Archibald Cox Jr)를 비롯해 미국 사모펀드 린지 골드버그의 설립자 로버트 린지(Robert Lindsay), 사모펀드 로즈몽캐피탈을 세운 크리스토퍼 하인즈(Christopher Heinz) 등이 조현준과 함께 세인트폴의 이사회 멤버로 활동했다.

존 케리(John Forbes Kerry) 전 미국 국무장관을 비롯해 ‘신문왕’이라 불리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세계적인 금융회사 ‘JP모건체이스’의 설립자인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아울러 아울러 듀폰(Du Pont) 가문, 펜실베이니아 금융기관을 석권한 멜론(Mellon) 가문, 대부호 록펠러(Rockfeller) 가문이 세인트폴스와 관련된 명문가다.

명문가 자제가 입학하는 만큼 고등학교지만 이 학교 기금이 아이비리그 대학의 재정을 능가하는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미 사립명문고 가운데에서도 등록금이 가장 높아 슈퍼리치들의 자녀들이 다수 입학한다.

160년 전통의 세인트폴 고등학교(St. Paul’s School)는 미국 북동부 보스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뉴햄프셔 주 콩코드시에 자리잡고 있다. 1856년 영국 성공회가 설립했으며, 전교생은 520여 명 정도로 미국 보딩스쿨 중 중간 규모에 해당한다. 하지만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5명에 불과해 교사 대 학생 비율이 미국 내 최저 수준이다.

이런 전통의 명문인 세인트폴은 2015년 불명예스러운 사건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일부 남학생들이 졸업 전 누가 더 많이 여자후배와 성관계를 하느냐를 겨루는 소위 ‘선배 의식’(Senior Salute)을 해온 추악한 전통과 함께 이 과정에서 성폭행 피해를 입은 학생이 발생해서다.

그럼에도 세인트폴 재학생은 미국 대통령후보의 연설을 제일 먼저 관전하는 특권을 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미국의 대선은 전통적으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출발하는데, 바로 세인트폴에서 대통령후보의 유세가 진행된다. 다만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꼽히기도 한다.

조현준은 중학교 졸업 후 미국 LA의 이모 댁에 1년간 머물면서 미국 고교 입학을 위해 준비했다고 밝혔다. 그의 정‧재계 굵직한 인적 네트워크는 세인트폴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으로 보인다. 그가 새삼 세인트폴 인맥의 위력을 실감한 일화도 유명하다.

일본 미쓰비시 상사 입사 후 말단 신입직원인 미쓰비시 상사 벤 마키하라 회장에게 불려간다. 회장과 평사원의 독대를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세인트폴’ 동문이라는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당시 마키하라 회장은 조현준에게 ‘당신이 미쓰비시 상사에 입사한 두 번째 세인트폴스 동문’이라며 반가워했다고 조현준은 회상한다.

조현준은 모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1987년부터 효성은 매년 국내에서 열리는 세인트폴스 입학설명회를 지원해오고 있으며, 세인트폴스에 입학한 ‘1세대 한국인’으로서 그는 2011년 결혼식도 모교에서 올렸다. 조현준은 이희상 전 동아원그룹 회장의 자녀 이미경씨와 결혼했다.

조현준은 세인트폴 사랑은 국내 동문회로도 이어진다. 세인트폴 국내 동문회를 조현준이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있으며, 국내 동문으로는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나경원 전 미래통합당 의원, 한화그룹 오너 3세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 등 정재계 주요 인사가 다수 참석한 바 있다.

나아가 그는 매년 세인트폴고의 선생님들을 초청해 한국의 문화와 교육열을 알리며, 미국 주류사회에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데까지 노력을 쏟고 있다.

 

케빈 플랭크(Kevin Plank)

미국 유명 스포츠브랜드 언더아머(Under Armour) 창업주로서 조현준의 사업 파트너였다. 조현준은 개인적으로 미국 유학 시절부터 언더아머를 즐겨 입으면서 남다른 애착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그는 2012년부터 일본에서 언더아머 제품을 수입·유통해 매출을 매년 100%이상 성장시켜 언더아머의 한국 시장 진출을 연착륙시킨 주역이다.

조현준과 친분이 두터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언더아머 제품을 입으면서 제대로 홍보 효과를 봤다. 언더아머는 한국에 자사 브랜드 홍보에 앞장섰던 조현준에게 공식적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으며 조현준은 다시금 케빈 플랭크와 이재용 부회장을 연결해 협업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케빈 플랭크는 카톨릭 계열의 엄격한 집안에서 5형제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남보다 활달한 성격과 경쟁심이 강했던 그는 엄숙한 분위기 속의 조지타운 프렙(예수회 계열의 사립 고등학교)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수업에서는 낙제하고, 술에 취해 근처의 조지타운대 풋볼 선수들과 싸움을 벌이다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당시 그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수업료를 아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당시 자신이 “얼간이”였었다고 회고했다.

플랭크는 24세에 워싱턴DC의 할머니 집 지하실에서 언더아머를 창업했다. 1996년 회사를 설립한 뒤 첨단 소재를 이용한 T셔츠를 만들어 판매했다.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풋볼(미식축구)팀 주장으로 활약했던 그는 극심한 몸싸움을 벌이는 풋볼 경기를 마친 뒤 면으로 된 옷이 땀으로 가득 차는 데 불편함을 느끼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플랭크는 문제의 해결책을 신소재에서 찾았다. 품질에 자신감이 있었던 플랭크는 선수 시절 인맥을 활용해 홍보했고, 선수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자 조지아텍을 시작으로 노스캐롤라이나대, 플로리다주립대 등에서 주문이 이어졌다. 입소문이 이어지면서 창업한 첫 해 매출액이 1만7000달러였던 언더아머는 2010년 10억달러 매출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풋볼 선수들의 입소문으로 사업이 흥했지만 사실 플랭크는 주목받는 풋볼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스카우터들로부터 외면당해 특기생으로 입학하지 못하고 메릴랜드 대학에서 일반 학생으로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운동을 하는 틈틈이 돈을 벌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발렌타인데이 때마다 장미를 팔거나 콘서트 티셔츠를 팔면서 1만7000달러를 벌었고, 이는 언더아머의 사업자금이 됐다. 당시 그는 자신의 기숙사 방에 신용카드 결제기까지 구비하면서 자금을 마련해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스포츠의류 업계 내 기존 강자들이 운동을 넘어 패션으로 영역을 넓힐 때였지만 플랭크는 오로지 기능성에 집중했다. 누구도 관심을 쏟지 않던 분야를 발굴해내면서, 소규모 회사로서 스포츠 의류업계의 후발주자였던 언더아머는 2014년 아디다스를 제치고 미국 시장에서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2018년 기준 매출 49억달러(5조7000억원), 시가총액 107억달러(12조5000억원)의 대형 브랜드로 성장했다.

하지만 플랭크는 최근 미국 의류 브랜드들의 동반 추락 속에 실적 악화로 고전하다 지난해 10월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2017년 트럼프 행정부 출범 초기 기업인 자문단의 일원이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샬러츠빌 백인우월주의 시위 유혈사태 등을 둘러싸고 양비론을 내세우며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데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대통령 자문단에서 가장 먼저 탈퇴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데일리임팩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