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김민영 기자

[미디어SR 정혜원 기자]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 모범적인 경영인으로 꼽히는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한국 기업 역사와 수산업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도전과 성장을 멈추지 않는 김 회장은 ‘재계의 신사’로 불린다. 창업 후 50년 동안 성실하고 치열하게 기업경영에 몰두했으며 정도 경영의 길을 걸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제조업이 아닌 원양어업으로, 처음부터 전 세계를 무대로 해 지금의 대기업을 일궈냈다는 점에서 동원그룹이 성장해온 발자취는 더욱 특별하다.

이를 대변하듯 김재철은 ‘거꾸로 된 세계 지도’로도 유명하다. 그는 “세계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한반도는 더이상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끄트머리에 매달린 반도가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을 발판으로 삼고 드넓은 태평양의 해원(海原)을 향해 힘차게 솟구치는 모습”이라며 남다른 발상과 통큰 스케일을 체화한 인물이다. 

1935년 전남 강진의 농촌에서 9남매 중 첫째로 태어난 그는 강진농고를 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하면서부터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서울대 농대에 장학생으로 입학 허가까지 받아 놓은 상태에서 부산의 수산대로 급선회하면서 김재철의 긴 여정은 시작됐다.

그는 서울대에서 수산대로 진로를 바꾼데 그친게 아니라 수산대 졸업후에도 도전정신을 발휘해 느닷없이 원양어선을 타고 전세계를 누비겠다고 결심하고, 무급 실습항해사로 지남호에 몸을 실었다. 

당시 수산대 졸업생들이 대부분 관련기관에서 근무하거나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일반적 관행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김재철은 대학 졸업후 첫 스타트부터 파도가 거세고 변화무쌍한 바다를 택했던 셈이다.

그당시 수산대 관계자들은 김재철을 ‘정신 나간 젊은 친구’라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자신이 배에 타야할 이유를 담당자가 묵고 있는 여관까지 찾아가 설득했다.

그는 결국 돈을 받지 않고서라도 배에 타겠다고 우겨, 항해 중에 사고가 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쓰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첫 번째 도전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그가 이토록 공을 들여 탄 배가 바로 우리나라 첫 번째 원양어선인 ‘지남호’다. 1958년 지남호의 승선자로 바다를 처음 접한 김재철은 지남2호의 선장으로 다시 배를 타게 되고, 이후 8년간 마도로스 생활을 이어가며 참치왕, ‘참치 잘 잡는 선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매번 배에 가득 실어올 정도로 참치를 잘 잡는다는게 원양어선업계에 두루 소문이 났던 것이다. 

바다생활을 직접 몸으로 익힌 그는 35세의 나이로 동원산업을 창업한다. 일본에서 어선 구입비로 37만달러의 차관을 담보나 정부‧은행의 지불보증 없이 오로지 신용으로만 도입한 것도 하나의 기록이었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가 쌓아온 신용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사장이 된 뒤에도 그는 직접 배를 몰고 고기잡이에 나섰으며 ‘참치 잘 잡는 선장’이라는 별명이 무색치 않게 동원산업의 원양어선은 월등한 어획고로 명성을 날렸다.

창업 2년만인 1970년 외화 획득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과 수산청장 표창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사업 수완도 좋아 바다에서 잡은 다량의 참치를 미국의 참치캔 1위 업체인 스타키스트에 팔아 막대한 규모의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렇게 자금을 모은 김 회장은 1981년 동원식품(현 동원F&B)을 설립하며 종합 식품회사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동원식품은 동원산업이 원양어업을 통해 잡은 참치를 캔으로 가공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동원그룹을 가능케 한 베스트셀러 상품 ‘동원 참치캔’이다.

김 회장은 다독가이면서 배움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회사를 경영하던 중에도 13주를 할애해 미국 하버드대 최고경영자과정을 밟겠다고 결심한다.

주변에서는 경영 공백을 우려했으나, 그는 잠시 맡기면 된다며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미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1981년 동원식품을 설립해 ‘식품 산업’을 키우고 당시 전혀 문외한이던 증권업에도 과감하게 뛰어들게 됐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1982년 한신증권을 80여억원에 사들였는데, 당시 하버드대학 MBA 출신들이 증권사를 선호하는 것을 보고 고급인재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고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증권업에서도 성공가도에 오른 뒤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해 증권가의 대표기업으로 정점을 찍었다.

김재철은 탁월한 경영능력과 화려한 혼맥 외에도 ‘뛰어난 통찰력’과 ‘수려한 문장’으로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그는 엄청난 독서량을 통해 앞을 내다보는 경영인의 혜안과 통찰력을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김 회장은 대단한 독서광으로 유명하다. 마도로스 시절 일본 시모노세키 항에 정박하면 헌 책방에 들어가 무게 단위로 파는 책들을 무작위로 사들여 항해 과정에서 모든 책을 섭렵할 정도였다고 한다.

동원그룹 관계자는 미디어SR에 “경영 철학이 뚜렷할 뿐 아니라 자기 관리가 철저하신 분”이라고 언급했다. 한때는 직원들도 김회장의 독서량을 따라잡기 위해 분주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사시를 통해 지난 반세기간 정도(正道) 경영의 길을 걸어왔다.

이에 따라 김 회장은 `기업인이라면 흑자경영을 통해 국가에 세금을 내고 고용창출로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기업인의 성실과 책임을 늘 강조한다.

창립 이후 처음으로 적자를 냈던 해에는 죄인이라는 심정으로 일절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경영에만 전념했던 일화도 있다. 동원그룹 관계자는 미디어SR에 “이같은 경영철학에 따라 그룹 내에서는 아무리 좋은 비즈니스모델이더라도 적자 구조는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이밖에 사시에서 강조하듯, 1991년 장남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대표에게 주식을 증여하면서 약 63억원의 증여세를 자진 납부하기도 했다.

그의 기준에서는 ‘사회정의’ 차원에서 증여세를 자진납부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자진납부 자체가 워낙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세무조사를 받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김 회장의 정도경영과 원칙은 자녀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김 회장은 두 아들이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되어서도 1주일에 적어도 한 권의 책을 읽고 A4용지 4~5장 분량의 독후감을 쓰도록 했다. 책을 많이 읽어야 통찰력이 생기고, 잘못된 정보에 속지 않는다는 것이 김회장의 지론이었다. 그 덕인지 그의 두 아들은 어릴적부터 경영수업을 톡톡히 받은 셈이 됐다. 

 

김남정

김재철의 막내 아들이자 동원그룹 부회장. 형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이 동원그룹의 금융업을 넘겨 받았다면, 김남정은 식품 산업 부문을 넘겨받는다.

중경고와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김남정은 1996년 동원산업에 입사해 창원의 참치캔 제조공장 생산직과 바쁘기로 소문난 청량리지역 영업사원 등 현장 경험을 두루 거쳤다. “경영자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애환을 몸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아버지 김재철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을 실천한 것이다.

이후 미국 미시간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은 뒤 귀국해 동원산업 경영지원실장과 동원시스템즈 경영지원실장을 거쳤다. 이어 2008년에 인수한 미국의 참치캔 회사 스타키스트 최고운영책임자(COO)를 거치는 등 경영수업을 받아 2014년 동원그룹의 부회장에 선임됐다.

부친을 도와 테크팩솔루션, 동부익스프레스 등 다수의 인수·합병(M&A)을 성사시키며 현재 동원그룹의 4대 주요사업축(수산-식품-패키징-물류) 기반을 완성했다. 2014년부터 5년동안 동원그룹이 인수·합병한 회사만 9곳, 인수를 위해 들인 돈만 1조원에 이른다.

한편 김남정은 대외적 활동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며 연설이나 인터뷰도 거의 한 적이 없다. 다만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신입사원부터 임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직원들의 의견을 듣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 임직원들의 신망이 두터운 것으로 전해졌다.

김재철 명예회장을 닮아 체구가 좋고 근검절약 정신이 투철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겸손하고 소박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엄격한 집안교육을 통해 어릴 적부터 용돈을 받기 위해 집안 일을 꾸준히 해왔다고 한다. 

김남정의 연애 결혼도 눈길을 끈다. 그의 아내는 33대 법무부 차관과 25대 국정원장을 지낸 신건(64) 세계종합법무법인 변호사의 셋째 딸 신수아(이대 장식미술학과 91학번)씨다.

두 사람은 동아리 선배의 소개를 통해 누나-동생 사이로 만난 뒤 6개월만에 연인 사이로 발전해 3년의 열애 끝에 결혼했다. 사돈인 신건 전 국정원장은 김재철 명예회장의 셋째 동생인 김재국(63) 전 동해하이테크 사장의 친구이기도 하다.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잡음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김남정 외의 다른 자녀들은 지주사 지분을 거의 보유하지 않도록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남구

김재철 명예회장의 맏아들이자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김남구는 회장직을 유지하던 아버지를 고려해 그간 부회장에 머물러 있다가 올해 초 회장으로 올라섰다. 그는 2003년 5월 사장 자리에 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3월 동원증권 사장에 취임하면서 “한국투자증권이나 대한투자증권 중 한 곳을 인수하겠다”고 선언한 뒤 실제로 한국투자증권 인수에 성공해 그의 뚝심을 보여줬다. 이 작업을 통해 그는 ‘오너 2세’에 그치지 않고 능력 있는 기업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김남구의 목표는 회사를 아시아 최고의 투자·금융회사로 만드는 것이다. 그 전초기지는 홍콩이다. 한국투자증권은 2018년 10월 홍콩법인의 사업 확장을 위해 4억 달러 규모의 주주 배정 유상증자를 단행했다.

그 전까지 홍콩 법인의 자기자본 규모는 1000만 달러에 불과했으나 단번에 40배 이상 덩치를 키웠다. 이로써 홍콩법인은 한국투자증권 현지법인 중 최대 규모가 됐다.

그는 “그동안 대한민국이 돈이 없어서 못 했지만 이제 돈이 많으니 해외투자를 할 수 있다”며 “옛날에는 물건만 수출했지만 이제 한국금융도 금융상품을 수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남구는 대학교 채용 설명회 현장을 매년 거르지 않고 직접 찾아다니고 있을 정도로 인재 채용에 관심이 많다다. 이같은 행보는 2003년부터 2019년까지 17년 연속 이어져왔다. 그는 지난해 9월 채용설명회 강연자로 나서 “한국투자증권이 아시아 최고를 넘어 세계 최고의 증권사가 되기 위해서는 최고의 인재가 필요하다”며 “최고의 인재가 모여 최고의 성과를 내고, 최고의 보상을 해주는 선순환을 만들어내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실제 한국투자증권에서는 직원이 김남구회장 등 경영진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 사례가 꽤 있다. 김연추 당시 한국투자증권 차장은 2018년 연봉 23억3400만원을 받아, 김남구 부회장(15억7700만원)이나 김성환 부사장(22억4400만원)보다도 높은 고액 연봉자임이 확인됐다. 다만 김 차장은 2019년 파격적 조건으로 미래에셋으로 이직했다.

김남구 회장의 별명은 곰이다. 일단 체구가 182cm로 큰 편인데다 한번 결정하면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특성이 곰의 이미지와 닮았다는 것이 이유다.

타고난 성향에다 아버지 김재철 명예회장의 혹독한 자녀 교육법도 한 몫했다는 전언이다. 김남구는 대학교 4학년 때, 회장 아들이라는 신분을 감춘 채 4개월 동안 북태평양행 명태잡이 원양어선을 탔다. 배 위에서 하루 18시간 넘게 일하며 뱃사람의 강인함과 도전정신을 체험했다고 한다. 

김남구회장은 1남 1녀를 두고 있다. 그의 장남인 동윤(28)씨는 2019년 한국투자증권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김회장은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서 아들을 평가하기에 아직은 이르고, 앞으로 더 두고 봐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고(故) 김정태

통합주택은행 초대 행장. 김재철 회장의 신임을 받아 동원증권으로 영입했던 인재로, 김남구 회장과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을 포함한 3명이 현재의 한국투자금융지주의 토대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故) 김정태 행장은 2014년 1월 급환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경기도 고양시 전원주택으로 물러나 농장을 가꿨다.

화려한 이력을 두루 거친 그는 3년 임기를 마친 뒤 미련없이 퇴직을 선언했고, 새 정부의 입각 제의도 뿌리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난 김 전 행장은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조흥은행에 입사하면서 금융계에 첫 발을 내딛은 후 대한투자금융과 대신증권을 거쳐 36세의 나이로 동원증권 상무로 영입됐다.

당시 김재철 회장은 김정태에게 “마음껏 일할 여건을 만들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으며, 김 회장이 약속을 지키면서 김정태는 인센티브 제도 도입, 무차입 경영, 스톡옵션(주식매입선택권) 등 파격적인 제도 개혁의 밑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다. 

입사한 지 1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김정태는 동원증권 사장 자리에 올랐고 외환위기 직후 한국주택은행장으로 발탁돼 최초의 ‘증권맨 출신 은행장’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그는 주택은행장 취임 당시 ‘월급 1원, 주식 30만 주’를 조건으로 내걸면서 당시로서는 생소한 스톡옵션 제도를 도입해 크게 주목받았다. 이 덕분에 그는 140억원의 차익을 올렸다. 그는 그 가운데 절반을 고아원과 노인복지시설에 기부해 또 한번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그는 취임 후 두 달 만에 “수천억 원의 적자가 나도 좋으니 부실자산을 모두 털어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잠재 부실 요인을 제거해 깨끗한 은행으로 새 출발하겠다는 의미와, 외국 CEO처럼 ‘과거 부실은 나의 책임이 아니니 모두 정리하고 새롭게 평가받겠다’는 의미있는 행보였다.

김정태는 얼마후인 2001년들어 옛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합병해 총자산 153조원 규모의 초대형 은행인 통합 국민은행의 초대 행장으로 또한번 발돋움하는 주인공이 됐다.

당시 4만원 선이던 국민은행 주가는 그의 재임 중 9만원 가까이 치솟았다. 증권가에는 '김정태를 보고 국민은행을 산다'는 말이 파다했고, '최고경영자(CEO) 주가'라는 신조어가 이 때부터 회자되기 시작했다.

 

천신일

세중여행사 회장이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 김재철 명예회장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졌으며 김재철의 차녀 은지씨에게 오작교가 되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화여대 정외과 출신인 둘째딸 은지 씨는 고(故) 김택수 전 국회의원의 4남인 김중성씨와 결혼했는데, 천신일의 여행사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서 인연이 닿았다고 한다.

천신일은 이명박 정권 시절 '대통령의 친구'이자 정권의 실세로 이름을 날렸으며, 김재철 회장뿐 아니라 내로라하는 정‧재계 인사들과의 친분으로 넓은 인맥을 자랑한다.

특히 그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의 ‘그림자’라고 불릴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신일이 이병철 회장의 개인적인 일을 처리해준 것이 세중그룹의 든든한 뒷배가 됐다.

주력 계열사인 세중나모여행의 전체 매출 비중에서 삼성그룹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달했으며, 30년 넘게 17만 삼성 임직원들의 국내외 출장 대행업무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다만, 2017년 들어서는 거래가 종료됐다.

하지만 여행사로 시작한 세중은 이제 세중정보기술·세중컨설팅·세중S&C·세중게임즈·세중디엠에스 등 전체 관계사 매출이 1000억 원대를 넘는 알토란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이 같은 지속적 상승곡선의 사업 확장은 천신일의 폭넓은 인맥이 상당부분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시선이 많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천신일은 고려대 61학번 동기로, 17대 대선 시기에 천신일이 고대 교우회장을 맡아 대학 동문들의 지지를 이끌었고 특별당비 30억원을 이 전 대통령에게 건넸던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1960년대 한일회담에 반발했던 대학생들 모임인 6·3동지회에서 인연을 쌓았으며, 이 전 대통령이 현대건설 회장으로 근무하던 당시에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기도 했다.

1943년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학 석사, 와세다대 법학 명예박사 과정을 마친 뒤 청운의 꿈을 품고 윤천주 전 서울대 총장의 의원 보좌관을 지내면서 꿈을 키운 것으로 전해졌다.

 

공병호

800쪽에 이르는 김재철 평전을 저술한 기업경영전문가이자 자신의 이름을 내건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자유기업원 초대 원장을 지낸 뒤 공병호 경영연구소를 설립한 그는 자기경영 분야의 독보적 존재로 꼽힌다. 특히 자타가 공인하는 '1인 기업가'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100여편의 책을 저술한 작가로도 유명하며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 ‘공병호TV’를 개설해 정치‧경제 논평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는 4일 기준 58만명에 이른다.

그가 2016년에 펴낸 저서 ‘김재철 평전, 파도를 헤쳐온 삶과 사업 이야기’는 김재철 명예회장의 삶과 경영 철학뿐 아니라 당시 한국 사회와 경제 상황까지 객관적으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은 이 책의 추천사에 “공병호의 도전이 평전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가게 될 것”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김진현 이사장은 ‘김재철 평전’이 객관적 통계와 광범위한 인터뷰, 그 시대 국내외 다양한 자료를 동원해 김재철의 삶과 경영철학뿐 아니라 당시 현실을 실체적으로 분석‧반영하고 있어 평전이자 연구서에 가깝다고 호평했다. 기존의 주관적 서술 위주의 평전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독보적 수준의 평전이라는 설명이다. 

공병호는 경남 통영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의 라이스대학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국토개발연구원, 한국경제연구원 등을 거쳤다. 재단법인 자유기업센터와 재단법인 자유경제원의 설립을 주도하면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을 구축했다. 그는 한 기고 글에서 “나라가 나에게 무엇을 해줘야 한다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썼다.

짧게나마 직접 창업 전선에 뛰어들어 CEO가 되어 보기도 했으나 큰 결실은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 경험을 ‘훗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정확하게 찾아낸 시기’로 해석했다.

대표 저서로는 '공병호의 자기경영노트', '부자의 생각', '불안한 평화' '좌파적 사고 왜 열광하는가' 등이 있으며 그가 펴낸 저서만 100여권에 이른다.

지난 2월에는 미래통합당의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이 그를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임명하기도 했으나, 모(母)정당인 미래통합당과의 갈등으로 한달여 만에 교체되는 아픈 경험도 있다.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이며 김재철 명예회장의 매제. 김남정 부회장에게는 아버지에 버금가는 멘토다. 박인구는 지난해 김재철 회장이 현직에서 물러나면서 지주사격인 동원엔터프라이즈 대표이사직을 함께 내려놨다. 다만 이사장직은 그대로 유지해 박인구는 신임 박문서 사장과 김남정 부회장의 그룹 경영을 보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사회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서의 권한을 유지하고 있다.

박인구는 정치 지망생이던 부친 대신 어머니 혼자 살림을 꾸려가야 했던 가난한 집안의 3남5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지역 명문인 광주서중에 합격하고도 입학금 1500원이 없어 학비가 전액 면제되는 조선대부속중학교에 입학했고 고등학교도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집안의 실질적 가장 노릇을 하기 위해서 내린 결단이었다. 그는 대학 대신 전화국 9급(당시 5급) 공무원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든 이후 주경야독으로 중등학교 준교사 자격시험부터 7급 행정직 공무원시험, 행정고시 등을 줄줄이 최우수 성적으로 합격했다. 행시까지 무려 9번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전설적인 공무원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1회 행정고시에서 종합 2등을 한 그는 상공부를 선택해 기업 지원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특히 그는 주미 한국대사관 상무관으로 3년 반 근무하는 동안 현지 백화점을 밥먹듯이 드나들었다. 당시 소비자 트렌드와 구매 성향 등을 주의깊게 살피면서 상품 판매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이 경험은 고스란히 CEO의 준비 과정의 자양분이 됐다.

그가 동원그룹에 합류한 것은 1997년이다. 박인구는 교육 기자재와 산업용 쇼케이스 및 패키징 필름을 만드는 동원정밀 CEO로 선임됐지만 당시 동원정밀은 만성적자에 부채비율이 600%에 달했다.

하지만 그는 현금 흐름을 개선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무사히 넘겼을 뿐 아니라 370억원의 매출을 522억원 수준으로 회복시켜 동원정밀을 ‘알짜 기업’으로 재탄생시키는 데 괴력을 발휘했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2000년 동원산업에서 분리된 동원F&B 사장으로 선임됐다. 그가 맡은 동원F&B도 국내 대표 식품기업으로 성장하면서 김재철 회장의 신임은 두터워졌다.

본격적으로 김재철 회장을 보좌하며 굵직한 인수‧합병을 추진한 그는 특히 2008년에 미국 최대 참치회사 스타키스트의 인수를 진두지휘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스타키스트 인수는 동원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토대가 됐다.

김재철 명예회장은 동원엔터프라이즈 대표이사를 설립 초기 2년 정도만 맡은 뒤 2003년부터는 17년 간 박인구에게 최고책임경영자(CEO) 자리를 넘겼다. 김재철 회장과 친인척으로 한 집안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엄밀히 따지면 직계존속은 아니다. 때문에 지분 승계 작업이 끝난 뒤 박인구가 동원엔터프라이즈의 전문경영인 역할을 맡아 안정적인 경영을 이끌어왔다는 평가가 많다.

박인구는 바쁜 가운데에도 조기축구를 빠뜨리지 않는 ‘축구광’으로 알려졌다. 그는 협력 플레이와 예측 불가능성을 축구와 경영의 공통점으로 꼽는다. 단 한번의 패스가 경기 흐름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국 순간의 선택이 결과를 좌우한다는 자신의 경영관을 축구에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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