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서울 여의도 한국수출입은행에서 열린 제2차 한국판 뉴딜 관계장관회의에서 발언 중인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 기획재정부
제2차 한국판 뉴딜 관계장관회의에서 발언 중인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 기획재정부

[미디어SR 정혜원 기자] 대기업이 벤처캐피탈(VC)을 소유할 수 있게 규제가 풀리면서 향후 업계에 상당한 지각변동이 올 전망이다. 30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최근 벤처 투자 활성화를 통한 경기 부양을 기대하면서 금산분리 원칙의 빗장을 풀면서 기업들이 이에 대한 대책 및 전략 마련에 분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는 여전히 규제가 많다고 비판하는 반면 시민단체는 금산 분리의 원칙을 풀고도 벤처 투자를 활성하지 못할 것이라며 정부의 결정에 반발하는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공정거래위원회, 국무총리실 등 관계부처는 지난달말 ‘일반지주회사의 벤처캐피탈(CVC) 제한적 보유 추진 방안’을 공동 발표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세계적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대기업 자금의 벤처 투자 확대, 회수시장 활성화를 통한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하고, 한국 경제의 혁신성‧역동성 강화를 기하겠다”고 설명했다. 회수시장이란 벤처투자에서 인수합병(M&A) 등을 통한 '투자금 회수(EXIT) 시장'을 뜻한다.  

CVC가 뭐길래?

대기업의 지주회사가 보유하는 벤처캐피털이 바로 CVC(Corporate Venture Capital, 기업형 벤처투자)다. 구글벤처스, 마이크로소프트벤처스 등이 대표적인 CVC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벤처캐피탈(VC)과 같이 성장 가능성이 큰 스타트업에 투자한 뒤 그 회사가 성공했을 경우 투자 자금을 회수해 수익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만 CVC는 수익과 함께 모기업과의 시너지 효과나 전략적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다.

그간 공정거래법상 일반지주회사(통상 대기업의 지주회사)는 금융회사인 CVC를 보유할 수 없었다. 금산분리 원칙 때문이다.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동시에 소유할 경우, 금융자본으로 보유하게 된 타인의 자산을 산업자본에 무분별하게 투입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엄격하게 분리해왔다.

대기업이 벤처캐피탈을 보유할 수 없어 현재는 지주사 체제의 대기업들이 지주체제 와는 무관한 계열사나 해외법인 형태로 CVC를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예로 지주사 체제가 아닌 삼성은 삼성벤처투자라는 CVC를,  한화 역시 한화인베스트먼트는 CVC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SK나 LG등은 규제가 없는 해외에서만 CVC를 운영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롯데는 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CVC인 롯데액셀러레이터를 지주사 체제 밖에 있는 호텔롯데 계열로 처분하기도 했다.

정부가 노리는 것: 잠재력 있는 벤처기업+풍부한 투자=경기 부양

하지만 벤처업계에서는 자금부족이라는 ‘가뭄 현상’이 해소되지 않자, 점차 대기업의 막대한 자본이 벤처업계로 흘러들어가도록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고조돼왔다. 이에 정부는 코로나19까지 덮친 엄중한 위기 속에서 경기 부양의 가능성을 엿보는 취지로 벤처 투자에 한해 금산분리 원칙의 예외를 두겠다고 밝히기에 이른 것이다.

정부는 규제를 일부 완화하는 대신 엄격한 제한 규정을 뒀다. 대기업 지주회사가 벤처캐피탈의 지분을 100% 보유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즉 지분 100%의 완전자회사 설립을 명문화함으로써 대기업이 일부 지분만으로 여러 개의 CVC를 설립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CVC의 난립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차입 규모도 자기자본의 200% 이내로 제한하면서 안정성을 담보하고, 펀드 조성 시에도 펀드 규모의 40% 이내로만 외부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경우에도 총수일가와 금융 계열사들은 CVC에 출자할 수 없다. 총수 일가 관련 기업, 계열사, 다른 대기업(대기업집단)으로의 투자도 금지되며, 해외 투자도 총 자산의 20%선에서만 가능하다.

아울러 CVC는 정부에 투자 내역과 자금대차관계, 특수관계인 거래 등을 공정위에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할 의무도 주어진다.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벤처 투자 활성화, ‘유니콘 기업’ 더 나올까

홍 부총리는 지주사의 CVC 보유를 허용하겠다고 밝히면서 알파벳의 예를 들었다. 구글의 지주사 알파벳이 세계 최대 차량공유 모빌리티 업체인 우버에 6년 전 투자한 2억5800만달러는 지난해 초 기준 52억달러 상당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불어났다.  알파벳은 또 차량공유 2위 업체인 리프트에도 5억달러를 투자했다. 

이처럼 정부는 CVC에 관한 규제를 완화해 시중의 풍부한 유동성이 벤처 투자 시장으로 유입돼, 장기적으로 혁신 성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알파벳의 예를 들어 정부의 '희망사항'을 넌지시 표현한 셈이다.

지난해 말 기준 대기업 집단의 일반 지주사가 가진 현금과 현금성 자산만 25조원에 이른다. 일반 지주사에 CVC 설립을 허용하면 이 자금의 일부가 벤처 투자 시장으로 흘러들어와 투자 기회나 규모가 더 확대될 수 있다는 예상이 가능하다.

이를 통해 벤처업계의 전반적인 생태계도 개선될 수 있다. 대기업 자회사인 CVC가 투자에 뛰어들 경우 투자 기업과 모기업 간의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해 투자 기업의 스케일 업(Scale-up·성장)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기업처럼 CVC도 투자한 벤처 기업의 인수‧합병(M&A)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면 일반VC의 '투자금 회수(Exit)' 시장도 더욱 활발해지기 마련이다.

 VC투자가 활발한 미국이나 이스라엘에서는 기업공개(IPO)뿐 아니라 M&A, 사모펀드(PEF)의 투자기업 인수 등 다양한 방식으로 투자금이 회수된다.

하지만 국내에서 투자금 회수 방법은 사실상 IPO가 거의 유일하며, 상장 후 초기에는 투자가 줄어들어 오히려 어려움을 겪게 되는 벤처기업도 상당수에 이른다.

하지만 대기업의 CVC로 인해 M&A를 통해 벤처기업이 대기업에 흡수되는 경우가 늘어나면 투자 회수금이 벤처 투자시장에 재투자되면서, '투자→(기업)성장→회수→재투자'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CVC 규제 완화가 투자활성화로 이어질까?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부 시민단체는 벌써 금산분리의 원칙이 무너졌다며, "펀드에 출자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의 순환출자를 허용한 것 아니냐"면서 의혹어린 시선으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한 예로 대기업의 손자회사가 자회사인 CVC 펀드에 출자할 수 있다는 점 등을 문제삼고 있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위원은 지난 20일 박용진 민주당 의원이 개최한 CVC 관련 토론회에서 “총수일가가 직접 CVC에 투자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해도 대기업이 계열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CVC에 투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막기 어렵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총수일가가 CVC를 사익편취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여전하다는 얘기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특히 "경제 활성화를 위해 대기업의 벤처투자를 촉진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일반지주회사가 CVC를 보유할 수 없기 때문에 대기업이 벤처에 투자를 못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박 의원은 당시 입장문을 통해 "정부가 애초에 시도하려고 했던 CVC 도입에 비해 우려를 다소 완화시킬 수 있는 안이 발표된 것은 다행스럽다"면서도 "다만 CVC 도입의 필요성은 면밀히 검증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기업이 외부 자금을 출자할 수 있는 수신(受信) 업무가 가능한 것도 정부가 기대한 효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는 ‘맹점’으로 꼽힌다. 외부 출자를 허용한 것은 막대한 규모의 사내 유보금을 벤처투자로 유도하겠다는 당초 취지와도 어긋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함께 투자기업의 기업가치가 과대평가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동자금이 급격히 불어날 경우 기업의 적정가치보다 실제보다 훨씬 더 높은 가격에 형성돼, 일반 투자자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CVC가 벤처기업에 미칠 악영향도 우려한다. 김진상 경희대 겸임교수는 “동일한 산업군의 거대 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는 순간 공식·비공식적으로 개발·제조·유통·영업 등 경영 전반에 걸쳐 자문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서 “이는 장점이기도 하지만 잠재적 경쟁자인 해당 거대기업에 스타트업의 노하우를 모두 공개하는 꼴이 되거나 지나치게 사업 의존도를 높일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CVC가 모기업의 ‘시너지 효과’나 ‘전략적 제휴’ 등을 명목으로 벤처기업의 영업력과 기술력 등이 부당하게 유출될 우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경우 CVC는 오히려 벤처기업의 경영 의욕을 떨어뜨리고 벤처기업 생태계를 해치는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국내에서는 기술 유출에 대한 법적 처벌이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 대기업의 협력업체 기술 유용에 대해 법원은 지난달말 “위법 행위가 맞지만 그로 인한 피해는 (위법 행위가 아닌) ‘위법한 결과'가 계속되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공정위가 대기업에 부과한 3억원의 과징금 대부분을 취소하는 판결을 내린바 있다.

(왼쪽부터)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 공영운 현대차 사장, 김기웅 위쿡 대표, 이석우 두나무 대표, 변창환 콰라소프트 대표가 대한상공회의소 샌드박스 지원센터 출범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 구혜정 기자
(왼쪽부터)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이인용 삼성전자 사장, 공영운 현대차 사장, 김기웅 위쿡 대표, 이석우 두나무 대표, 변창환 콰라소프트 대표가 대한상공회의소 샌드박스 지원센터 출범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 구혜정 기자

엇갈리는 반응...재계·벤처업계 "아쉽다" 이구동성

금산분리 침해를 우려하는 시만단체와 일부 전문가들과는 달리, 재계와 벤처업계의 반응은 기대 반, 아쉬움 반이다. 벤처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디어SR에 “사실상 금산분리 정책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본다”면서 “여전히 규제가 많지만 이번 기회에 CVC를 활성화됐으면 한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또한 정부 발표에 대해 벤처기업협회와 한국바이오협회 등으로 구성된 혁신벤처단체협의회는 공동 입장문을 내고 “국내에서는 금산분리 규제와 대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 등으로 투자 활동이 미흡했다”고 인정하면서 “민간 자본의 벤처 투자를 더욱 활성화하고 신산업 육성에 기여해야 한다”고 화답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각종 비율 제한과 함께 벤처캐피탈을 지주회사의 완전자회사 형태로 설립하게 한 점이 정책의 실효성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다.

정부는 이번 방안과 관련해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입법화를 추진하되, 정기국회를 통해 연내에 법안을 통과시킬 계획이다. 

한편 최근 5년간 벤처투자를 받은 기업 3381개 업체의 전체 가치가 무려 124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코스닥 전체 시가총액 209조8827억원(4월3일 기준)의 59.1%에 해당하며, 코스피 시장 기준으로는 SK하이닉스(57조9490억원)의 2배 이상 인 것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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