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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SR 정혜원 기자] 하도급 업체 기술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는 두산 인프라코어에 “기술유용은 인정되나 과징금은 부당하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두산인프라코어에 부과된 3억원대의 과징금은 2017년 당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중소기업 기술유용을 근절하겠다고 선언한 이후에 처음으로 공정위가 기술유용을 적발한 사례다.

이번 판결 또한 법원이 대기업의 기술유용을 인정한 첫 사례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행정6부(이창형 최한순 홍기만 부장판사)는 두산인프라코어가 "시정명령과 과징금 납부 명령을 취소하라"며 공정위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지난 22일 원고패소 판결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재판부는 “과징금 산정시 관련 고시를 잘못 적용했다”며 공정위가 부과한 과징금 3억8200만원 중 3억6200만원을 취소했다.

법원이 처음으로 대기업의 기술유용은 인정했으나 과징금 산정 방식을 문제 삼으면서 공정위가 부과한 과징금 대부분을 취소했다.

공정위는 2018년 11월 두산인프라코어에 시정명령과 과징금 부과 명령을 내리면서 △기술자료 제공 요구 △서면 교부 의무 미준수 △기술자료 유용 등 3가지를 지적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굴착기 부품인 에어 컴프레셔와 냉각수 저장탱크를 공급하던 하도급업체 2곳에 납품 단가 조정과 관련 기술자료를 요구했다.

기술 자료를 요구하면서는 이를 서면으로 교부하지 않았다. 회사는 이같은 기술자료를 경쟁 하도급업체에 넘기면서 본래 하도급계약을 맺은 곳과는 거래관계를 종료하려고 했다.

다만 냉각수 저장탱크의 경우는 도면을 받은 새로운 사업자들과 조건이 맞지 않아 실제 거래가 성사되지는 않았다.

하도급법상 원사업자가 하도급 업체의 기술이 담긴 도면을 확보하려면 정당한 사유와 함께 이를 서면으로 교부해야 한다. 또한 서면 교부 시 기술자료의 요구 목적과 비밀유지 방법, 자료의 권리 귀속 관계, 제공 방법, 대가‧지급 방법, 요구 정당성 입증 등 7가지 사항을 명시해야 기술자료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두산인프라코어는 서면을 제공하지 않은 채 하도급 업체들의 도면을 손에 넣었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에서 기술유용의 개념을 명확하게 밝혔다. 재판부는 “원사업자가 자신의 이익 또는 하도급사에 손해를 입히고자 하도급사 기술을 사용하거나 제3자에게 제공하면 기술유용”이라며 “원사업자가 실제 이익을 취하거나 하도급사에 실제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 

아울러 재판부는 기술자료의 범위도 넓게 정의했다.

재판부는 “사용되고 있지 않은 잠재적으로 유용한 정보나 과거 실패한 연구데이터 등 정보도 경제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며 “생산·영업활동에 이용될 정도로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했어도 기술자료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원사업자와 하도급업체 간 기술자료 비밀유지 약정이 묵시적으로라도 이뤄졌다면 ‘비밀관리성’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임신혁 하도급법 전문 변호사는 미디어SR에 “최근까지도 원 사업자가 하도급 업체의 기술 유용을 적발하기가 어려워 처벌 사례 자체가 매우 드물었다”면서 “공정위가 적극적으로 기술유용 등을 적발하고 처벌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라고 평가했다.

서울법원종합청사 전경. 제공: 서울고등법원
서울법원종합청사 전경. 제공. 서울고등법원

위법성은 인정...과징금은 축소?

하지만 재판부는 공정위 판단 일부를 뒤집었다. 공정위는 협력사 도면을 다른 업체들에 전달한 이후로도 기술자료 유용 행위가 지속되고 있다고 봤으나 재판부는 “(위법 행위가 아닌) 위법한 결과가 계속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판시했다. 이 때문에 재판부는 두산 인프라코어에 부과된 과징금 대부분을 취소했다.

다만 공정위는 2016년 7월 말부터 하도급법 위반행위에 대한 과징금 고시를 개정해 시행한 바 있다.

이 고시에 따르면 기술유용 행위는 법위반금액 비율 산정이 곤란한 행위로서 정액과징금이 부과된다.

또한 기술유용의 경우 ‘매우 중대한 위반행위’로 분류돼 최소 3억원에서 최대 5억원 이하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있다.

이같은 취지의 판결이 대법원 판결로 확정될 경우 공정위는 이번 재판과 관련한 과징금을 재산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향후 공정위 고시가 법원을 통해 번번이 무력화될 가능성도 있다.

여전한 기술유용, 원청 꼼수 기승

문재인 대통령이 제조업 생태계를 훼손하는 기술유용 행위에 대한 근절을 국정과제로 제시했으나, 여전히 현장에서는 기술유용 및 탈취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임신혁 하도급법 전문 변호사는 미디어SR에 “하도급법과 함께 공정위도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있지만, 여전히 원 사업자의 꼼수로 인해 실제 집계된 기술유용 사례보다 실제 기술 유용 사례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임 변호사는 특히 “원청과 하청 간 계약 유무가 해당 법 적용의 기준이지만 이를 피해가는 원청이 많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계약 유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있게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다만 해당 법 체계 내에 충돌하는 부분이 있어 (개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원 사업자가 계약 전에 기술자료를 요구한 뒤 계약은 진행하지 않는다던지, 원 사업자를 대신하는 제3의 사업자가 하도급 업체의 기술 자료만 챙긴 뒤 원 사업자에 제공하는 방식이 만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소재‧부품‧장비 등을 대기업에 공급하는 하도급업체들의 경우 기술자료가 사업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 자산이다.

그럼에도 이를 유용해 경쟁업체에 제공하는 등 피해가 잇따르더라도 피해 규모를 계량화해 측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때문에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술유용 피해로 인한 손해액 산정 방식을 규정하는 내용을 최근 발의한 바 있다.

이번 판결로 기술유용의 위법성이 인정돼 공정위의 기술유용 제재가 탄력을 받게 됐다.

제재에 불복해 소송 중인 현대건설기계와 한화, 최근 제재 조치된 현대중공업 등 기업에는 불리한 판결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법원이 이어지는 판결에서도 과징금 산정을 문제삼을 경우 위법성만 인정되고 처벌은 받지 않는 사실상의 ‘솜방망이 처벌’이 관행으로 자리잡게 될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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