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영 디자인 기자

[미디어SR 정혜원 기자]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부사장. 정몽준의 맏아들이자 정주영 현대가(家) 창업주의 손자다. 30여년 만에 오너체제로 전환하는 현대중공업그룹의 최고경영자로 나서기 위해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최근 미모의 동문과 결혼식을 올린 것으로도 이목을 끌었다.

1982년생으로 대일외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마쳤다. 이후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근무하기도 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기자생활은 부친 정몽준이 권유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기회로 삼으라는 뜻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현대중공업 재무팀 대리로 입사했다가 입사 7개월 만에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MBA)과정을 마치고 2011년 보스턴컨설팅그룹 한국지사에서 2년간 컨설턴트로 일했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현대중공업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것은 2013년부터다.

2013년 경영기획팀 선박영업부 수석부장으로 복귀해 본격적으로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직책은 선박영업부 수석부장이었으나 재무와 기획, 영업, 기술 등 다방면에 걸쳐 경영수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정기선은 2015년에 상무보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상무로 승진해 그룹 기획실에서 재무와 기획 등 업무를 관장했다. 입사한 지 5년 만의 상무 승진으로 현대중공업 사상 ‘최연소 임원’이자 재계에서 가장 나이 어린 임원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경영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상무 승진 1년 만에 다시 전무로 승진하면서부터다. 사내 핵심부서를 모두 총괄했다. 그후 현대글로벌서비스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본사가 있는 부산에 거처를 마련하고 현대중공업지주와 현대중공업에서 맡은 직함을 소화하기 위해 하루를 시간 단위로 쪼개 서울과 부산, 울산까지 오가면서 일정을 소화해냈다.

상대적으로 기술적 분야에 취약하다는 지적을 보완하기 위해 기술분야의 전문용어나 최신 기술동향 등을 습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의문거리가 생기면 담당 임직원들에 그때그때 질문하고 주말에도 출근해 주중에 챙기지 못한 서류들을 살펴보며 업무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애쓰는 노력형이라는 평가도 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겸손하고 소탈하다는 것이 주변의 공통된 평가이기도 하다. 회사 중역들에게는 몸을 낮추고 직원에게도 말을 높인다.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 대표이사 부회장이 지난 2018년 4월 기자간담회에서 “정기선을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 때까지 모두 지켜봤는데 정말 겸손하고 성실하다”며 “최근 재벌2세나 3세가 겪고 있는 갑질이나 횡포 등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언급한 바 있다.

그는 할아버지인 정주영 창업주를 경영자 겸 롤모델이자 스승으로, 아버지인 정몽준에 대해서도 깊은 존경심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주영 창업주를 향한 존경은 정기선이 사우디아라비아와 현대중공업그룹의 돈독한 관계를 다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정기선은 현대중공업그룹과 아람코가 합작 조선소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현대중공업그룹이 진행해야 할 모든 과정을 직접 도맡았으며 이를 위해 수 차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다. 이런 정기선을 보며 아민 알 나세르 아람코 CEO는 “사업기회를 포착하는 예리함은 정주영 일가의 DNA”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프로젝트 협의차 지난 2016년 7월 사우디아라비아의 에너지장관과 아람코 경영진을 만나는 자리에서 당시 정기선은 두 시간 전쯤 회동 장소에 도착했으며 상대방에게 줄 선물로 은으로 만든 거북선을 준비했다고 한다. 거북선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특별한 손님을 만날 때 주던 선물이다.

2019년 6월 빈 살만 왕세자가 방한했을 때는 문재인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이 모여 국가적 협력을 논의한 자리에 최연소로 참가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측에서 정기선의 참석을 먼저 요청한 것으로 밝혀져 존재감을 과시한 바 있다.

 

정몽준

현대중공업지주 최대주주이자 정기선의 아버지이며 아산나눔재단 명예이사장이다. 기업경영과 정치, 축구행정 등 분야를 넘나들며 많은 성과를 냈지만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이후로는 사실상 정치 활동을 중단했다.

현재는 과거 활동들을 모두 접어두고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만 맡고 있으며 정기선의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 가장 최근의 소식이다. 정기선은 아버지인 정몽준을 대단히 존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인이자 각종 재단을 운영하며 부의 사회 환원에 적극적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기선은 아버지 정몽준의 영향으로 ROTC에서 군복무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몽준은 1951년생(70)으로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여섯째 아들이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메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짧은 기간 현대중공업 사장과 회장으로 경영책임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30년 동안 대부분의 기간을 현대중공업지주의 최대지주로서 경영에 간접적인 영향력만 행사하고 있다. 2014년 조선업황 악화로 현대중공업이 3조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냈을 때도 전문경영인체제를 유지한 바 있다.

1988년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92년에는 아버지 정주영 현대 창업주가 창당한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당선되기도 했으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내리 7선 국회의원으로 성공가도를 달렸다.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과 함께 현역 최다선 국회의원에 이름을 올리고 현 미래통합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당 대표도 맡은 바 있다.

정몽준은 2012년 대통령 선거까지 출마하면서 꿈을 키웠지만 2014년 막내 아들 정예선의 ‘세월호 유가족 비하 사건’ 논란 등으로 여론이 매우 악화해 낙선했다. 이후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했고 2016년 말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자 새누리당에서 탈당한 뒤로는 아산나눔재단과 아산사회복지재단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182cm의 큰 키에 소탈하고 겸손하지만 우유부단한 면이 있어 학창 시절 ‘꺼벙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창업주 정주영의 자식 가운데 유일하게 서울대에 진학하자 정주영은 크게 기쁜 나머지 당시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들을 초청해 크게 한턱을 냈다고 한다.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국제축구연맹(FIFA) 부회장을 맡아 한국과 일본 월드컵 공동개최에 기여했다. 피파 명예부회장에 오른 뒤 피파 회장에도 도전했으나 윤리위원회로부터 자격정지를 받으면서 무산됐지만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오랜 기간 맡아 한국 축구가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주영

“이 봐, 해봤어? 해보니 되더라.” 이 한마디로 불가능과 위기를 혁신과 실천으로 넘어서고 경제 발전과 성장을 이룩해온 범 현대가(家) 창업주이자 혁신가. 1915년에 태어나 2001년 향년 86세로 타계한 정몽준의 아버지이자 정기선의 할아버지다.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 산골에서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정주영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4번이나 가출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평생 허리 한번 제대로 못펴고 죽도록 일해도 배불리 밥 한번 못먹는 농부로, 아버지처럼 고생만 하다가 늙어죽고 싶진 않았다”고 했다.

‘장남이 가족의 기둥’이라며 설득하러 온 아버지에게 덜미를 잡혀 돌아가기 일쑤였으나 19살의 나이로 마지막 가출을 감행해 쌀가게에서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잔꾀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일한 정주영에게 가게 주인은 생각지도 못한 제의를 한다. 1938년 1월, 정주영은 24살에 경영인으로서 ‘경일상회’라는 첫 간판을 달고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건설과 중공업,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한국경제의 중심을 잡고 있는 수많은 산업군이 사실은 정주영의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몇 번이나 넘어지고 좌절을 겪어야 했다.

직접 건 첫 간판은 바로 이듬해 일제가 전시군량 확보를 위해 쌀배급제를 시행하면서 문을 닫게 됐다. 그간 모아둔 돈과 사채업자에게 빌린 돈으로 1940년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했지만 그마저도 20여일 만에 공장에 불이 나면서 그는 길바닥에 나앉을 처지로 전락했다.

고향이 답답해 4번의 가출을 감행한 정주영은 이 때도 다시 도전했다.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를 찾아가 빌린 돈을 갚으려면 돈이 더 필요하다고 추가 대출을 요구했다. 담보도 없는 그에게 사채업자는 더 큰 돈을 빌려준다. 정주영이 평소 꼬박꼬박 외상 쌀값을 갚아온 것을 눈여겨 보고 그의 신용을 높이 산 것이다.

이후 홀동광산을 운영하다가 해방 후인 1946년 4월에 미군정청의 산하기관인 신한공사에서 적산을 불하받아 현대그룹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설립했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을 다 잃은 듯 했지만 동생 정인영이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일한 덕에 토목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8군 발주 공사를 대거 수주하게 됐다.

한국 전쟁 직후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등을 복구하면서 증가하는 건설 수요로 승승장구했으며 시멘트 사업에 진출했을뿐 아니라 해외 건설시장까지 확보해 사업을 폭발적으로 키웠다.

만족하지 않고 다시 발을 넓혀가면서 울산 조선소 건설, 서산 앞바다 간척 사업까지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1년 현대자동차‧건설‧시멘트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한다.

중공업에 진출한 것은 1973년. 정주영이 1970년 런던으로 날아가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들이대며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도입을 이끌어낸 사실은 지금도 회자되는 소설같은 일화다. 정기선은 이같은 할아버지의 도전 정신을 존경해, 발주사와의 오찬 자리에서 “창업자를 향한 믿음이 오늘날의 현대중공업을 만들었다”는 감회를 밝히기도 했다.

정주영은 경영 활동 중 여러 파고를 넘기면서 정계에도 진출한 바 있다. 1992년 초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제14대 총선에서 전국구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그 해 12월 통일국민당 소속으로 제14대 대선까지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듬해 2월에 의원직을 사퇴하고 통일국민당을 탈당했으나 1998년 이후에는 김대중 정부를 도와 대북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의 도전정신은 1998년 2차에 걸쳐 소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한 역사적 이벤트로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권오갑

현대중공업지주 회장이자 정몽준 최대주주의 심복. 정기선의 멘토 역할로도 알려졌다. 1978년 현대중공업 플랜트영업부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40년 만에 그룹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랐다. 현대중공업그룹 회장직은 지난 2017년 말 최길선 회장 퇴임 이후 2년간 공석이었다. 정몽준의 신임과 그룹 내 신망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권오갑이 현대중공업그룹의 지주사체제 구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정기선이 수주 등 경영성과를 내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는 점을 성과로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1951년 2월10일 태어나 한국외국어대학교 포르투갈어과를 졸업했으며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런던사무소 외자구매부 부장, 서울사무소 전무를 거쳐 현대중공업 부사장과 울산현대호랑이축구단 대표를 지냈다. 현대중공업이 아부다비 국제석유투자회사로부터 현대오일뱅크를 인수하면서 현대오일뱅크 사장을 역임했다.

당시 현대오일뱅크 사장을 맡으며 신규 투자와 조직 문화 혁신 등을 통해 영업이익 1300억원대 회사를 1조원 규모로 성장시켰다. 현대중공업이 글로벌 조선업 부진으로 위기를 겪으며 2013년 2조원대 영업손실을 내자 이듬해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및 그룹 기획실장으로 복귀했다.

이후 비핵심 분야 사업 재편, 자산 매각 등을 통해 회사 정상화 기틀을 마련했다. 또 현대건설기계, 현대일렉트릭, 현대로보틱스, 현대에너지솔루션 등 비(非)조선 사업을 분할하고, 현대중공업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2016년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2018년부터 현대중공업지주 대표이사 부회장을 맡다가 현대중공업지주 회장으로 선임됐다.

최근에는 로봇 개발과 ‘스마트 공장’을 강조하고 나섰다. 지주사의 자회사인 현대로보틱스는 대형 및 중형 로봇이 주력이었는데 소형 로봇으로 제품 라인업을 넓힌 것이다.

또한 중국 로봇업체인 '하궁즈넝'과 산업용 로봇 합자회사를 설립하는 협약을 체결하고 2019년 상반기까지 산업용 로봇을 연간 최대 2만 대 생산할 수 있는 스마트팩토리를 짓고 중국 다른 지역이나 개발도상국으로도 수출 확대를 노린다.

책임감이 강하며 자기관리가 철저한 리더라는 평가를 듣는다. 2016년 장인상 때 외부에 알리지 않고 업무를 수행했으며 2012년 모친상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한편 권오갑은 직원들과의 소통을 중요시한다. 그룹 관계자는 미디어SR에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시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임직원들과의 소통자리를 절대 빠뜨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덕분에 현대오일뱅크 사장 시절 노사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능력을 보여줬다.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 시절 일주일에 한번 서울에서 충남 대산공장으로 가서 현장 직원들과 똑같이 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아침식사를 하며 일과를 시작했던 일화는 특히 유명하다.

현대중공업지주로 복귀하면서도 본사 해양사업부 출입문에서 출근하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힘을 모아 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태풍의 영향으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직원들과 일일이 손을 잡고 파업 자제를 당부하면서 경영 정상화를 위한 임직원들의 이해를 호소했다.

뿐만 아니라 사장 업무용 차량인 에쿠스를 직원들 결혼, 장례식 등 경조사에 사용할 수 있도록 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필요할 때는 과감히 칼을 빼들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가삼현

정몽준의 복심이자 정기선의 해외 영업 멘토. 1957년 9월20일 충청남도 태안 출생으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가삼현은 정기선과 연세대 동문이기도 하다.

입사 후 해외영업차장 등을 역임하다가 가삼현은 1993년 정몽준 최대주주가 제47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맡게 되면서 그 뒤를 따라 현대중공업 소속으로 대한축구협회에 파견됐다. 16년 넘게 정몽준과 함께 축구협회에 몸담으면서 협회 내 국제부장과 대외협력국장, 사무총장까지 두루거치며 정몽준의 복심으로 통한다.

성실성과 무거운 입이 특징으로,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의 의중을 잘 읽는 임원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힌다.

월드컵 대표팀 성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감독 영입 시 실무를 책임진 협상 창구역할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즉 거스 히딩크와 움베르투 코엘류, 요하네스 본프레레, 등 외국인 사령탑을 영입할 때 실무를 책임지면서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을뿐 아니라 교섭능력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중연 전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가삼현 사무총장은 16년 4개월 동안 일하면서 20억원 수준이던 협회의 예산규모를 700억 원 규모로 만들어 놓은 한국축구발전의 산 증인”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가삼현은 현대중공업에 복귀한 뒤로도 조선사업본부 영업총괄과 그룹선박해양영업본부 본부장 등을 맡으며 해외영업 부문에서 꾸준히 경험을 쌓았다. 정 이사장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임원이라는 점도 선박영업본부 본부장 선임의 배경으로 꼽혔으며 조선업황 부진을 영업력 강화로 돌파할 구원투수로 사내외 신망을 얻었다.

영업력과 교섭 능력 등을 인정받아 정기선과 함께 국제무대에 참석하는 등 가삼현은 정기선에게 ‘실전’ 경영수업인 수주 협상에 대한 원포인트 레슨을 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2015년 정기선의 상무 시절 국제 3대 가스분야 행사인 ‘가스텍2015’에 참석할 때 당시 선박해양영업 본부장을 맡고 있던 가삼현이 동행했다. 당시 행사는 글로벌 에너지기업 관계자와 각국 정부의 에너지담당관, 주요 선주 등 국제 에너지분야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가삼현의 동행으로 정 상무의 국제무대 참석이 더욱 돋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로도 가삼현은 정 전무와 여러 차례 해외영업활동을 함께 나서면서 글로벌 대형석유기업과 주요 선주들을 만나 수주 논의를 진행했다. 정기선 전무가 처음으로 주도한 2015년 세계 최대 석유회사 아람코와 양해각서(MOU)를 성공적으로 체결한 데 이어 이란 국영선사 이리슬(IRISL)과의 수주 계약에도 성공한 것은 국제통인 가삼현의 코칭이 윤활유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김동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맏아들이자 그룹 후계 1순위. 정기선과는 돈독한 사이로 2016년 8월 김동관 부사장의 할머니인 강태영 여사가 세상을 뜨자 정기선도 빈소를 찾았다. 당시 ‘어떤 인연으로 오셨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제가 동관이랑 친구입니다”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김동관은 2010년 한화그룹에 입사한 뒤 한화솔라원을 거쳐 한화큐셀까지 태양광 사업에만 집중해왔다. 2010년 시작한 한화의 태양광 사업 실적은 2018년까지 들쑥날쑥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난해 태양광 부문 매출액이 종전 3조원대에서 5조원을 내다보는 규모로 급성장했다. 한화그룹이 김 부사장의 경영능력을 부쩍 강조하기 시작한 것도 지난해 들어서다.

김동관 부사장은 그동안 차근차근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미국 세인트폴고, 하버드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010년 한화그룹에 입사했다. 한화그룹 회장실을 거쳐 2015년 1월부터 11월까지 한화큐셀 상무를 지냈고 그해 12월 전무로 승진했다.

그간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해 말에는 한화솔루션 부사장에 올라섰다. 김 부사장은 한화그룹이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아온 태양광 부문에서 영업·마케팅 최고책임자로서 영업적자를 흑자로 전환시키는 등 그룹 내에서 경영 능력을 인정 받은 것으로 관측된다. 부사장 승진과 동시에 한화솔루션 전략부문장을 맡으며 사실상 경영 전면에 나섰다.

또한 그가 주도해 미국 수소트럭 업체 니콜라에 투자한 성과가 ‘잭팟’으로 평가 받으면서 경영 보폭이 더욱 넓어질 전망이다. 김동관이 2018년 초 한화의 미국 현지 벤처투자 전담조직 보고서를 중요하게 살펴보고 수소사업의 장밋빛 미래와 함께 니콜라 투자 필요성을 인지해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장선익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의 장남이자 동국제강 경영전략팀장 이사. 정기선은 장 이사와 중학교와 대학교를 함께 다닌 동기동창이다.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서 함께 근무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1982년생으로 2007년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동국제강 경영전략실에 그해 입사했다. 이후 미국 등 해외법인에 법무팀까지 두루 거쳤으며 그 가운데 2015년에는 일본 히토츠바시대 경영학 석사과정까지 마쳤다. 2016년 34세 동국제강 비전팀 이사로 승진, 입사 10년 만에 초고속 승진 코스를 밟았다. 다만 장선익은 0000년 술집 난동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장선익이 동국제강 이사로 재직하던 중 그가 서울 용산경찰서에 재물손괴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고 알려지면서다. 당시 장선익은 종업원과 종업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중 술이 보관돼 있던 진열장에 물컵을 던졌고, 양주 5병을 깨는 등 소란을 피웠다. 장선익이 자신의 혐의를 시인하며 배상을 약속하고 공개적으로 본인 명의의 사과문을 올리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는 사과문에서 “어떤 변명을 해도 제 잘못이 분명하기에 진심으로 깊게 후회하고 있다”면서 “지난 수년간 각고의 구조조정을 하고, 이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회사와 임직원 여러분에게 큰 상실을 드린 점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2018년 6월부터 사내 핵심 부서인 경영전략팀으로 자리를 옮겨 그룹 후계자로서의 경영 수업을 착실히 받고 있다. 올해 초에는 '2020 철강업계 신년인사회' 행사를 찾아 경영활동의 보폭을 넓히고 있다.

또한 동국제강의 승계 작업도 착실히 추진되고 있은 것으로 보인다. 장선익 이사가 보유한 지분은 지난 5월 기준 총 70만2134주로, 지난해 12월 0.5%에서 0.74%로 크게 늘었다.

코로나19로 인한 하락장에서 주식을 사들여 올해 장내매수한 동국제강 지분만 4억5000만원 상당으로, 21만7594주다. 현재 동국제강의 최대주주는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으로 13.94%를, 2대주주는 장 회장의 동생인 장세욱 동국제강 부회장(9.43%)이다.

한편 장선익은 한화 그룹 장남인 김동관과 함께 지난 4일 가족 위주로 소규모로 치러진 정기선의 결혼식에도 참석해 남다른 친분을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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